우연이라도 좋으니 다시 한 번 만나고 싶었다. 그리고 다시 길 위에서 다시 마주할 때 그를 먼저 알아보는 것은 자신이었으면 좋겠다고. 츠키시마는 생각했다. 마주치지 않게, 그저 바라볼 수 있게. 그리고 그런 츠키시마의 바람이 이루어졌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그만의 독특한 실루엣. 츠키시마는 쿠로오를 알아보고 숨을 멈추었다. 검은 셔츠에 블랙진. 츠키시마가 유난히 좋아했던 쿠로오의 옷차림새였다. 언제나 편한 옷을 고집하던 쿠로오가 단정하게 차려 입으면 그게 그렇게나 섹시해보였다. 흰색보다는 검은색이 잘 어울리는 남자였다. 목 끝까지 채워져 있는 단추를 하나 하나 풀어내리는 것이 츠키시마의 작은 즐거움이었다. 그랬었지. 이제는 과거형이 된 추억에 츠키시마의 입가에 서글픈 미소가 걸렸다. 건너편 신호등을 바라보는 것 같던 쿠로오가 방향을 틀어 츠키시마가 서있는 곳의 횡단보도로 몸을 틀었다. 츠키시마는 저도 모르게 입간판 뒤로 몸을 숨겼다. 한 걸음, 두 걸음. 쏟아져나오는 것 같은 사람들 사이로 쿠로오가 가까워져갔다. 혹시나 자신을 눈치채진 않을까 츠키시마는 숨죽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쿠로오는 츠키시마를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지나쳐가는 쿠로오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선 츠키시마가 선물해주었던 향수의 냄새가 났다. 아, 아직 버리지 않았구나. 쓰고 있구나. 멀어지는 쿠로오의 뒷모습에서 헤어지던 날의 그의 뒷모습이 겹쳐보였다. 아무 말도 없이 짐을 정리한 쿠로오는 시릴만큼 서늘하던 무표정으로 제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텅 빈 집을 나섰었다. 왜 헤어졌었더라. 이유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츠키시마는 구차한 걸 알면서도 쿠로오의 뒤를 쫓았다. 조금 더 바라보고 싶었다. 잘 지냈는지. 조금 살이 빠진 것 같은 날카로운 옆모습을 더 보고 싶었다. 츠키시마는 들키지 않도록 조심조심 거리를 두고 쿠로오를 따라 걸었다. 쿠로오가 번저 들어선 곳은 서점이었다.
음반을 파는 곳에 서서 새로 발매된 노래를 몇 곡 들어보다 시디 한 장을 골라 집었다. 츠키시마가 좋아하는 밴드였다. 쿠로오의 취향에도 맞는다고 했었던. 함께 거실에서 즐겨듣던 밴드의. 아직 이 밴드도 듣는구나. 새로 나온 밴드의 음반을 구경할까 해보았지만 쿠로오를 놓칠 것 같아 츠키시마는 계산을 하고 나서는 쿠로오의 뒤를 계속 쫓았다. 유난히 오늘 멋을 낸 것 같은 쿠로오가 이대로 다른 연인을 만나러 가면 어쩌나 마음 졸이면서도 그만 둘 수 없었다. 그의 발걸음이 자신과의 추억을 되짚는 것 같으면 그게 그렇게도 기뻤다.
그러면서도 서글펐다. 그렇게 헤어졌으면, 내게서 뒤돌아섰으면 나같은 건 훌훌 털어버리고 아무렇지 않게 살면 될 것을 왜 이렇게 제 그림자에서 못 벗어난 것처럼 보이는지. 카페, 공원. 쿠로오는 계속해서 츠키시마를 추억하듯 그와 함께 행복했던 시절의 공간을 맴돌았다. 그래서 더욱 쿠로오를 뒤쫓는 것을 그만두지 못하는 츠키시마였다. 그리고 쿠로오는 꽃집에서 프리지아 한다발을 사 품에 안았다. 츠키시마가 좋아하던 꽃이었다. 그리곤 쿠로오가 전철을 타곤 어디론가 향했다. 사람들이 드물어 들키진 않을까 걱정됐지만 이제는 쿠로오가 자신을 알아차려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래서 조금 대담하게 츠키시마는 쿠로오와의 간격을 좁혔다. 하지만 쿠로오는 여전히 츠키시마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쿠로오의 발걸음이 조금 무거워지는가 싶더니 유리문을 열고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온통 조용하고 사람도 별로 없는 곳. 쿠로오는 무언가를 찾는 듯 주변을 둘러보다 어느 한 곳으로 들어섰다. 벽이 모두 장식작 같은 것으로 되어 있는 곳. 하나의 유리장을 열어 들고온 꽃과 음반을 두고 다시 닫은 유리장엔 쿠로오의 인영만이 비쳤다. 츠키시마의 눈이 커졌다. 유리장 너머 꽃다발 사이로 쓰여진 것은 츠키시마 케이. 자신의 이름과 무표정하게 교복을 입고 찍은 사진이 있었다. 쿠로오가 마지막으로 들어온 곳은 츠키시마의 유골을 안치한 납골당이었다.
서글피 우는 쿠로오의 모습에 츠키시마는 그제야 왜 자신이 쿠로오와 헤어졌는지 기억났다. 횡단보도를 건너다 빠르게 다가왔던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불빛. 떠오르던 몸. 머리에 가해지던 충격. 작년의 어제. 츠키시마가 죽은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