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조각 땃따따 35번 썰 기반
두통, 시야의 빛 번짐 같은 것이 잦았다. 때때로 업무에 지장을 줄 정도로 심한 두통에도 그저 과중된 업무로 약해진 몸 상태 때문이려니. 모두가 가끔씩은 겪는 피로감 때문에 그런 것이려니 안일하게 생각했다. 업무 특성상 언제나 신경을 있는 대로 곤두세워야 했으니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럴 것이라고 넘겼다. 남들도 다 겪는 정도일 텐데 병원에 들락거리는 건 엄살을 떠는 것 같아 내버려두었다.
어느 날 아침 일어났을 때 눈을 떴음에도 일순간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을 때, 시야가 돌아온 후에도 안개가 낀 것 같았을 때에도 그저 너무 피곤할 뿐인가 생각했던 것 같다. 형과 함께 식사를 하며 시력이 좀 나빠진 것 같다며 흘리듯 말하자 그는 이런 저런 증상들을 물었고 평소에 느끼던 걸 솔직하게 답하자 표정이 한층 굳어졌다. 당장 병원에 가야겠다던 말은 마냥 형의 과보호인 것 같아 귀찮았다.
단순하게 잠시 눈이 흐렸던 걸 가지고 이렇게까지 큰 검사를 받아야 하나 싶을 정도의 검사들을 받았다. 검사 결과가 나오는 당일 어머니와 먼저 이야기 하겠다는 형의 굳은 얼굴에 조금씩 겁이 나기 시작했다. 바로 결과를 가르쳐 주지 않은 채 외국에 있는 아버지에게 연락을 취하는 행동에 그제야 뒤로 미뤄두었던 불안감이 야금야금 커져갔다.
3교대가 끝나고 집에 와서 피곤한 상태로도 형은 어디론가 끊임없이 전화를 했고 컴퓨터 앞을 떠나지 않았다. 새벽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전화가 길어지고, 추가 검사가 이어지는 나날들이 길어지자 생각보다 상태가 좋지 않구나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믿기 힘든 결과에도 네 명밖에 되지 않는 가족 중 두 명이 의사인 것은 여러 가지 의미로 편한 일이었다. 얼핏 주워 듣기로는 오진의 가능성. 약물 치료부터 수술, 안구이식까지 알아보지 않은 것은 없는 것 같았다. 나에 대해 유난했던 형과 아버지의 애정을 알고 있다. 그 두 사람이 쉽게 꺼낼 수 있는 진단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랬기에 수긍은 쉬웠다. 집에서 늘 보는 형의 모습이 아닌 가운을 걸친 의사의 모습으로 진료실에 앉아 참담한 표정으로 결과를 전하는 형의 표정에 부정할 겨를도 없이 결과에 대해 납득할 수 있었다.
빠르면 두 달, 길어야 2년. 나는 실명을 앞둔 상태라고 했다.
“눈이 안보여도 할 수 있는 일을 배워야겠네.”
그 말에 어머니는 왈칵 눈물을 쏟으셨고 형은 고개를 돌렸던가. 더듬더듬 이어지는 병명이나 어려운 의학 용어 같은 것은 이젠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사실 그렇게 덤덤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납득했다 하더라도 실감이 잘 나지 않아서였겠지. 앞으로 세상을 볼 수 없을 것이라는 현실에 대한 미미한 자각에서 비롯된 덤덤함.
내가 실명에 대한 자각이 없다는 것은 사직서를 내고도 바로 일을 그만둘 수가 없어 인수인계를 하는 동안 단순한 호기심에서 비롯된 배려 없는 날카로운 질문과 걱정들로부터였다. 사직서를 내는 이유는 공공연히 알리지는 않았지만 소수에 의한 소문은 빨랐고 무례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사람들의 오지랖 어린 질문들과 조언들이 상처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보이는 동안 안 보일 때를 대비한 연습을 할 수 있어 다행이라는 말엔 그걸 위로라고 하냐며 악을 지르며 대들 뻔한 것을 간신히 이를 악물며 참았다. 욕만 하지 않았지 험악해진 표정을 숨길 수는 없어 그제야 무신경한 발언에 대한 사과가 돌아왔지만 그런 가벼운 사과로는 마음만 축날 뿐이었다.
회사를 그만 두고 난 후 막상 출근을 하지 않자 준비할 것은 생각보다 적었다. 언제까지 집에서 도움을 받으며 살 수는 없으니 혼자서 살 수 있는 집을 구해서 나가겠다는 설득을 하기까지만이 힘들었다. 하지만 원하는 대로 되자 그 다음이 막막한 것이었다.
무조건 손으로 많이 만져보고 닥치지도 않은 상황을 시연해보자니 막연한 것 투성이에 기분만 답답해져서 매사가 예민해질 뿐이었다. 하루에 한 번 이상은 꼬박꼬박 전화로 안부를 묻는 형에게 애꿎은 화풀이를 한 후에서야 상처 받은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혹시 내가 이 다음 순간 바로 눈이 보이지 않게 된다면 마지막으로 기억에 남을 형의 얼굴은 자동적으로 떠오른 이 상처받은 얼굴이겠구나 싶어서.
“좋은 것들을 많이 보고 싶어.”
가족들은 그 말에 눈꼬리가 붉어진 채 웃었고 난 그 때부터 막연히 집 안의 구조들을 더듬으며 안에서만 멍하게 있는 것보다는 예쁘다고 생각했던 것들, 보면 행복하다 느낄만한 것들을 많이 찾아다녔다. 늦은 겨울. 눈이 내려 하얗게 변해 버린 세상과 집 앞에 생겼다 사라지는 갖가지 모양의 눈사람. 서리가 붙어 가장자리를 설탕으로 꾸며놓은 것 같은 나무의 잎사귀들.
봄의 한 가운데 흐드러지게 피었다 떨어지는 벚꽃 잎이 하늘을 수놓는 장면. 비가와 떨어지고 난 다음에도 물웅덩이 위로 흔들리며 여전히 하늘 속에서 춤추는 듯 예쁜 꽃잎.
병아리의 부리 같기도, 이제 막 펴기 시작한 날개 같기도 한 개나리와 그만큼 앙증맞은 잎사귀들의 조화. 우체통의 빨강을 닮은, 제 몸통만큼 커다란 란도셀을 메고 엄마의 손을 잡은 채 등교하는 볼이 발그레한 아이들은 싫어했음에도 불구하고 귀여워 보였다.
연두색의 어린잎들이 짙은 녹음으로 변해가며 봄비라 부르던 가랑비가 점차 굵어지는 것 또한 차근차근 눈에 담았다. 비와 함께 밀려드는 여름 냄새. 아, 이런 냄새가 나기 시작하면 거리는 이렇게 변하기 시작하는구나. 그런 사소하고도 소중한 일상을 오래오래 마음에 담으려 했다.
팔레트의 물감을 모조리 풀어 놓은 것 마냥 고운 색으로 물드는 하늘의 색깔 변화들. 먹색이 밝아지며 희어지고 다시 푸르러졌다 분홍으로, 주황으로, 어쩌면 노랑이 섞이며 다시 보라색에서 먹색, 까맣게 변하는 하늘을 바라보는 것은 며칠이고 질리지 않는 풍경이었다.
하다못해 계절의 정취만이라도 한 번씩 눈에 담고 보이지 않게 된다면 좋으련만. 어쩌면 그건 욕심일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들었다. 점점 잦아지는 내 눈 속에서만 끼는 안개가, 일어났을 때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랬다. 정말 바로 다음 날 아침, 아니면 눈을 깜빡이고 난 다음 순간 시력을 잃을 수도 있다는 조바심을 떨쳐내려야 떨칠 수가 없는 것으로 자꾸만 많은 것을 보고 마음에 담아두고 싶었다.
스트레스와 몸의 컨디션에 따라 금방 상태가 악화가 될 수 있다는 조언에 가만히 집에서 쉬는 날도 있었다. 잠잠하다가도 갑자기 실명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해올 때에는 집에서 잔뜩 가져온 어린 날의 앨범을 펼쳤다. 무서울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고 힘들었어도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떠올릴 수 있는 무용담 가득했던 청춘의 페이지들로 눈을 돌리자면 그래도 조금 기분이 괜찮아졌다.
하나씩 추억을 곱씹으며 앨범을 보다 몇 장의 사진에서 페이지를 넘기던 손이 멈췄다. 노을 진 창고 뒤 바비큐 파티를 하던 장면. 특이한 머리스타일의 두 사람에게 둘러싸여 어깨가 두드려 지고 있던 고등학생이던 자신. 재미있다는 듯 웃는 검은 머리의 남자 위에 손가락이 살포시 얹어졌다. 짧다면 짧은 인생이었지만 그 중 가장 최고라 꼽을 수 있는 시절, 그 중에서도 가장 빛나던 첫사랑. 쿠로오 테츠로.
[츠키시마 케이입니다. 잘 지내시나요?]
붉고 화려한 꽃잎이 바람에 넘실거리는 꽃무릇의 군락지를 바라보자니 너무 강렬해서 오히려 촌스러워 보일 수도 있는 색을 잘도 소화해 내던 그가 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충동적으로 메시지를 보내보았다. 충동적이라고 하기에는 앨범에서 그의 사진을 보고 추억을 다시 떠올렸을 때부터 건너 건너로 그의 연락처를 알아내어 저장하는 과정부터 이미 연락하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 있던 것이지만 막상 실행으로 옮기기에는 용기가 나지 않았었다.
이젠 시야가 흐릿해지는 빈도도, 잠들었다 깼을 때가 아니더라도 앞이 암전이 되는 일도 훨씬 더 많아졌다. 이루어지지 않을 사랑에 평생 도전도 해보지 못하고 남들에게 알리지도 못한 채 포기해야했던 첫사랑인데.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그를 닮은 붉은 색에 그제야 용기가 났던 것이다.
답장이 오지 않는 시간은 몇 분에 불과했지만 그 찰나에도 나는 괜히 보냈나 하는 자책과 후회에 괴로웠다. 될 대로 되라지. 무시당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지. 그런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였다. 처음엔 그를 떠올리게 했던 예쁜 꽃으로 눈을 돌려보려 해도 온 신경이 휴대폰에 가 있어 꽃들의 아름다움도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자 한숨을 내쉰 뒤 돌아가려던 순간 전화가 왔다.
「쿠로오 테츠로」
저장해 두었던 이름이, 그토록 많은 감정으로 기다렸던 이름에도 처음에 든 생각은 혹시 잘못 알게 된 번호라 이상한 문자라고 생각해 따지려는 전화인가 싶어 겁이 났다. 사실 그이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니었을 때의 실망감이 두려워 몇 번의 진동이 울리는 것을 내려다보다 끊어지는 것은 더 싫었기에 겨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네. 여보세요.”
[츳키? 카라스노 안경군?]
“하……. 그게 대체 언제적…….”
[맞구나! 쿠로오씨 깜짝 놀랐다고! 잘 지내?]
묻지 않아도 너무나도 잘 지냈음이 여실한 반가운 목소리였다. 낮고 부드러운, 조금 들뜨면 둥글어지던 말투. 그 목소리, 어조로 불린 과거의 애칭에 한숨을 쉬는 척 했지만 절로 입 꼬리가 올라갔다. 어쩐 일이느냐 대뜸 물어봤다면 솔직하게 답하기 곤란해 통화가 길게 이어지지 못했을 것이지만 그는 자연스레 대화를 이어나가주었다.
사소하고 두루뭉술한 근황이 오갔고 일을 쉬고 있다는 내게 쿠로오씨는 조금 있으면 거기 곧 축제 있지 않아? 내가 미야기에 갈게. 오랜만에 얼굴이라도 한 번 보자. 라고 운을 띄웠다. 만나고 싶다고 생각만 하고 먼저 연락했으면서도 만날 구실 하나 생각하지 못했던 나였기에 그의 살가움이 마냥 다행이었다. 언제 아예 눈이 보이지 않게 될지 몰라 멀리 나서지 못하고 있던 처지에 쉽사리 도쿄에 가겠다는 말도 못했는데, 먼저 만나자고 하지 못하던 의중을 눈치 챈 것일까.
아주 단편적인 인연이었을 뿐인 사람의 뜬금없는 연락에 어쩐 일이냐며 떨떠름한 답장만 보내줬어도 감지덕지였을 텐데. 일사천리로 만날 날짜까지 정한 뒤 나는 전화를 끊고 가슴 가득 벅찬 기쁨에 보는 이들의 시선 따윈 생각지도 못한 채 만면에 웃음이 퍼지는 걸 멈출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여전히 모난 성격은 그와 만나기로 한 날이 가까워질수록 새로운 걱정을 만들어냈다. 변한 나를 보고 그가 실망하면 어떡하지. 아니, 내가 그에 대해 멋대로 실망해버리면 어떡하지. 계속 주고받는 쿠로오와의 연락이 즐거울수록 걱정은 더 커졌다. 이렇게 마음대로 그에 대한 환상을 키우다 혹여 그의 변한 겉모습이라거나 만나서 어색할 때 첫사랑에 대한 이미지를 망치지는 않을까. 혹여 즐겁지 못한 기억으로 남는다면 어떡하지. 빛나는 추억인 채로 냅둘 것을 괜한 짓을 했나. 어찌 보면 쿠로오에게 굉장히 실례되는 생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걱정은 붙잡을 수 없었다.
“야아-. 오랜만이야.”
그런 쓸데없는 걱정들은 사실 그를 지나간 과거의 한 페이지로 추억하고 있던 것이 아닌, 현재진행형으로 마음에 담고 있었던 것인 탓이었을까. 역에서 나오는 그를 보는 순간 두근거리기 시작한 마음은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을 봐서 긴장한 것보다는 다시 사랑을 만난 설렘에 가까웠다.
삐죽삐죽 제멋대로 하늘로 솟은 검은 헤어스타일은 여전했지만 좀 더 여유로워 보이는 표정이나 어른스러워진, 아니 이젠 정말 어른이 된 생김새는 내 상상보다 훨씬 근사한 모습이었다. 악수가 아닌 가까워지자 팔을 두드리며 어깨동무를 하는 그는 마치 저번 주에 만났다 헤어진 사람처럼 순식간에 수 년 간의 공백을 메우는 친근함으로 다가왔다.
“츳키, 키가 더 큰 것 같아?!”
“쿠로오씨가 작아지신 게 아닐까요.”
“윽. 이제 나이가 들어서 뼈가… 아니고! 너무하네! 아직 그럴 나이는 아니거든!”
“서른을 넘기셨으니 정말 뼈가 줄어들었을 가능성도…….”
“그러는 우리 안경군도 내일 모레면 앞자리가 바뀌지 않으신지?”
“그 때 쿠로오씨는 더 나이 들어 계시겠죠.”
“아아……. 우리 귀엽던 안경군이 어느새 이렇게나 자라서…….”
미운 말만 하는 게 어느 입이지요! 어깨에 둘렀던 팔에 힘을 줘 내리며 코를 아프지 않게 꼬집는 것이 마치 어린아이를 대하는 것 같아 순간 마음이 철렁했다. 아이를 다루는 것이 익숙한 것이 혹시라도 결혼이라도 해 아이가 있는 것은 아닐까 싶어서.
“어린애도 아니고, 정말 그만하세요.”
“안경군이 너무 여전해서 다시 고등학생으로 돌아간 것 같은걸~”
왜 그에게 연인이 있다거나 결혼을 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건지. 축제가 열리는 신사로 가는 길에 유카타를 입고 신나서 뛰어다니는 아이들이 다리에 부딪쳐도 웃으며 비틀거리는 아이들을 넘어지지 않도록 잡아주거나 웃어주는 얼굴이 너무 자연스러워 두근거리던 마음이 언제 그랬냐는 듯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처음 반했던 고등학생 시절보다 더 빛나는 사람이 되어 있는 그가 비단 제 눈에만 좋아 보일 리는 없었다. 이전에도 특유의 친화력으로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원래도 좋은 게 좋은 거지. 라는 모토로 성격이 좋은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세월이 만들어준 더 견고한 자신감이나 여유가 넘치는 모습에 훨씬 더 멋있어졌다. 시시콜콜한 일들을 들어보지 않더라도 분명 이런 모습을 만들어줄 많은 일들을 그만의 방식으로 잘 풀어가며 살아왔던 거겠지.
어른스러운 매너에 적당히 아이 같은 장난스러움. 만나지 못한 몇 년 간의 공백 같은 것은 친화력으로 없애버릴 수 있는 남자. 그런 사람이 이 나이를 먹도록 혼자인 게 더 이상한 일 아닌가. 그저 마지막으로 가장 좋아했던 사람을 눈에만 담고 싶다고 했던 생각은 어디로 간 건지. 대체 뭘 기대했던 건지. 스스로가 한심하고 바보 같았다.
아, 차라리 정말 좋은 사람과 사랑을 하고 있는 편이 더 나을까. 그의 옆자리가 비워져 있다 한들 여러 가지 현실로 인해 어려울 시작이었고 그 수만 가지 이유로 혼자 접었던 사랑이었다. 하물며 이제 곧 앞도 보이지 않을 자신이 넘볼 사람이 아니었다.
애초에 미련을 없애기 위한 만남이었음을 상기시키고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다. 부질없는 욕심에 그와의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고 그의 왼손에 반지가 끼워져 있지는 않은지 기웃거리던 시간이 아까워졌다. 이제 축제가 끝나고 헤어진다면 다시 보지 못할 사람이었다. 저도 모르게 다시 욕심이 날 만큼 멋진 사람. 그저 다시 이렇게 보게 됨에 감사하기로 했다.
“아, 쿠로오씨 저 잠깐만요.”
“응?”
“쿠로오씨도 하나 드실래요?”
“탕후루?”
왁자하게 늘어선 신사의 상점 중 단연 눈길을 끈 것은 숯불에 구워지는 먹음직스러운 고기 꼬치도, 야키소바도 아닌 색색의 과일이 설탕옷을 입고 반짝거리는 탕후루였다. 축제라면 으레 하나는 꼬박 꼬박 사먹는 탕후루였기에 이번에도 자연스레 탕후루 쪽으로 쿠로오의 소매를 잡아 끌었으나 눈이 휘둥그레지는 반응에 새삼 제 취향에 멋쩍어졌다.
“안 드실거죠?”
“응, 나는 좀 더 둘러보고.”
보기에는 가장 좋아 보이지만 베어 먹다 온 입술이 설탕으로 찐득해지는 사과사탕보다 먹기에 편한 딸기 사탕이 좋았다. 유난히 올해는 더 빨갛고 과실이 예쁜 것 같아 쿠로오의 흥미진진한 시선에 부끄러운 것도 잠시 사탕을 손에 들자 기분이 좋아졌다. 한 입에 알맞게 들어오는 딸기 한 알을 입에 넣고 이로 오목하게 들어간 부분을 깨물면 얇게 입혀진 설탕 옷이 파삭 부서지며 바삭하게 달콤한 맛과 새콤한 딸기맛이 촉촉하게 온 입 안에 퍼진다.
“츳키, 딸기 좋아했던가?”
“아-. 뭐……. 네.”
“진짜 맛있게 먹네. 나도 먹고 싶어졌어.”
“아, 하나 사드릴까요?”
“아니, 하나면 될 것 같은데.”
무슨 소리인가 싶어 쿠로오를 멀뚱히 보자 씨익 웃은 그가 탕후루를 쥐고 있는 내 손목을 잡곤 고개를 숙여 두 번째 딸기를 베어 물었다. 갑작스럽게 잡힌 손목과 살짝 틀어진 그의 고개며 내리깐 눈에 다시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너무 놀라 잡힌 손이 움찔하고 온 몸이 굳었다.
“엑.”
“아, 역시 다네.”
“먹던 걸!”
“음? 난 괜찮은데……. 아, 나 간염 같은 거 없어! 걱정 마!”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라…….”
한낮의 열기가 가시고 있는 저녁의 초입임에도 잡힌 손목에서부터 확 열이 오르는 것 같아 더워지는 것만 같았다. 혹시라도 얼굴까지 붉어지진 않았을까 당황스러운 기색을 감출 수가 없었지만 그는 다행히 나눠 먹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표하는 것이라 생각한 것 같았다. 고개를 젓자 내가 뺏어 먹은 게 그렇게 아깝냐! 라며 웃는 얼굴을 더 마주하다가는 정말 머리 꼭대기까지 빨개질 것만 같아 괜히 짜증을 내며 앞장 서 나아갔다.
“모자라면 하나 더 사줄게~”
“아니라니까요!”
“앗, 츳키. 나 저거!”
“하아?”
쿠로오씨 입술이 닿은 부분. 아,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되는데. 황급히 머릿속에 들어선 생각을 무르고 아드득 아드득 소리를 내며 무슨 맛인지도 느껴지지 않는 딸기 사탕을 씹으며 앞장서 가는 나를 이번엔 쿠로오씨가 붙잡았다. 뭔가 하고 돌아본 곳엔 금붕어 건지기를 하는 상점이 있었다. 사격이나 공 던지기라면 어울리지만 금붕어 건지기? 의외의 조합에 고개가 갸웃했다.
“축제는 역시 금붕어 건지기지!”
열심히 금붕어를 건지는 어린아이와 그를 응원하는 부모님 옆으로 간 쿠로오씨는 나를 보며 할래? 권유했고 나는 당연히 고개를 저었다. 얇은 종이로 금붕어를 건지는 데에 열을 올리는 데엔 별로 흥미도 없었거니와 만약 성공한다고 해도 며칠 살지도 모르는 연약한 생명을 집에 가져가 길러야 한다는 것이 제법 성가신 일이었기 때문에.
두 번 권하지 않은 쿠로오는 동전을 건네고 받은 종이 뜰채로 어린아이의 옆에 쪼그리고 앉아 신중하게 수조 안을 들여다보았다. 다시 역에서 만났을 때는 마냥 어른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역시 학생 시절을 알고 있던 사람이어서 그런지 그 시절의 모습과 겹쳐 보인다. 아무리 어른이 된다고 해도 아직 남아 있는 그 때 그 모습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오랜 시간 멀어져 있었다 한들 너무 먼 곳으로 모르는 그가 되어 있지 않아서. 이 모습을 보며 내가 반한 그 시절을 떠올릴 수 있어서.
저녁의 어스름이 푸르게 깔린 공기 중으로 상점들의 주황 불빛이 번지고 그 아래 긴 몸을 접고 앉아 작은 물고기와 실랑이를 하고 있는 모습조차도 퍽 그림이 되는 이상한 남자. 서른을 넘긴 나이임에도 저렇게 사소한 것에 집중하는 것이 귀여워 보인다는 게 믿기지 않는 일이다.
“됐다!”
아슬아슬하게 찢어지기 일보직전이던 얇은 종이가 예쁜 금빛 금붕어를 겨우 통에 담고 구멍이 뚫렸다. 봤냐며 신이 나서 들뜬 얼굴에 정말 건질 수 있을 줄은 몰랐던 나도 작은 감탄사를 보내며 고개를 끄덕여주었고 그의 얼굴은 더욱 의기양양해졌다.
“우와…….”
축하한다며 노점상에게 금붕어를 투명한 비닐에 담아 묶은 것을 받아들었을 때 받은 종이 뜰채가 모두 찢어지도록 한 마리도 건지지 못한 옆에 있던 아이의 부러움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자신의 손에 들린 빈 바구니와 쿠로오가 받은 물고기를 번갈아 보는 아이는 못내 아쉬운 듯 부모의 얼굴을 보았지만 귀엽다는 듯 웃기만한 부모는 이제 가자며 아이의 손을 끌었다.
“저기! 괜찮으면 이 물고기 네가 데려갈래?”
“정말요?!”
“어머. 그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저는 어차피 멀리에서 와서 가져가기도 좀 그랬거든요. 실례가 아니라면 아이에게 선물로 주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나 대신 물고기랑 좋은 친구 되어줘야한다! 인심 좋은 아저씨처럼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손수 물고기 봉지를 쥐어준 쿠로오씨가 감사하다며 배꼽인사를 하는 아이가 깡총거리며 멀어질 떄까지 손을 흔들어 주었다.
“정말 줘도 괜찮아요?”
“응? 뭐, 어차피 도쿄로 가져가기도 곤란했고. 정말 건질 수 있을 줄 몰랐거든. 아니면 츳키한테 주려고 했지. 제 2의 쿠로오씨라고 생각하고 잘 부탁드립니다. 하고.”
“……옆에 저 아이가 있어서 참 다행이었네요.”
“나는 츳키를 이렇게 매정한 아이로 키운 기억이 없는데! 아빠는 슬프구나. 흑흑.”
“저희 아버지는 지금 일본 반대편에 계십니다만.”
“아아~ 그럼 식전 운동도 했겠다 야키소바를 먹으러 가볼까!”
말 돌리기 대회라도 있으면 대상감이 따로 없네. 아까부터 대답이 막힐만 하면 다른 곳으로 화제를 돌리는 게 아주 수준급이다. 어물쩡 대화를 넘기는 것조차도 얄미워 보이지 않아 그저 너털웃음만 나왔다. 이젠 완전한 저녁이 되어 초승달이 뜬 하늘 아래 축제 속 신난 그의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곧 있으면 불꽃놀이 하겠다!”
“미야기 주민이세요?”
“많이 알아봤다고~!”
“그럼 불꽃놀이 보기에 명당인 곳을 제가 따로 안내 해드리지 않아도 되겠네요..”
“선생님. 그런 게 있으면 빨리 말씀해주셔야죠. 어디로 모실까요.”
“아저씨…….”
“가자 가자~”
야키소바며 닭꼬치, 구운 옥수수를 나눠 먹으며 이런 저런 이벤트들이 있는 곳들도 둘러보고 나면 시간은 어느덧 달이 한참 위로 올라갈 만큼 훌쩍 지나있었다. 아는 사람이 몇 되지 않는, 우연치 않게 형과 발견했던 비밀장소 같은 곳이 있었다. 조금 산을 올라가야하는 곳이지만 어느 곳보다 신사의 불꽃놀이가 잘 보이는 곳이었다.
“그런데 귀중한 주말을 내가 괜히 방해한 건 아닌가 모르겠네.”
“네? 그게 무슨.”
“주말이니까 츳키도 데이트 같은 게 있지 않았을까 해서.”
“그러는 쿠로오씨야 말로 직장인의 귀중한 주말에 괜히 저 때문에 데이트도 못하시는 거 아닌가요.”
“나는 애인 없는데.”
“의외네요. 너무 아이 다루는 게 자연스러워서 결혼이라도 하신 줄 알았는데.”
“너무하네! 아니, 뭐 할 나이인가……. 그러는 츳키는? 애인 있어?”
“있었으면 이걸 쿠로오씨랑 보러 오지는 않았겠죠.”
“아……. 쿠로오씨 두 번 상처 받았어.”
“농담입니다.”
“와. 여기 진짜 축제가 한 눈에 보이네! 난 또 츳키가 날 어디론가 이상한 데에 팔아넘기는 줄 알았어.”
“아쉽네요. 팔 데를 미리 좀 알아두는 건데.”
“아, 시작한다.”
시답지 않은 농담 따먹기를 하는 도중 커다란 소리와 함께 첫 번째 불꽃이 하늘로 피어올랐다. 하늘에 피어오르는 불꽃에 짙은 먹색이던 하늘이 환해지고 그의 얼굴에도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반걸음 뒤로 물러서 있던 내게 더 눈에 들어오는 건 화려한 불꽃놀이 보다는 그에 집중한 쿠로오씨의 모습이었다. 밤하늘보다도 더 어두운 그의 머리카락 색이라던가, 불빛에 희게 빛나는 옆얼굴. 은은하게 짓고 있는 미소. 소원이라도 빌 듯 가지런히 깍지 낀 여전히 곧고 예쁜 손가락.
아직 결혼 안했구나. 왜 아직 애인이 없는 거지. 그의 마지막 말에 또 속도 없이 마음이 소란했지만 커다란 소리를 들어서 그런지 오랜만에 북적이는 사람들 틈바구니 속에서 있다 조용한 곳에 와서 그런지 일렁이기 시작하는 시야와 지끈거리는 머리에 다시 마음이 가라앉았다. 이런들 저런들 어차피 내가 욕심을 내면 안 되는 사람이라는 경고를 몸이 주는 걸지도 모르겠다.
“지금 봤어, 츳키?”
그의 뒤로 퍼지는 무수한 빛 가루들이 번져 보이며 일렁이는 와중에도 환히 웃는 그 모습이 반짝거려 웃을 수 있었다. 눈을 깜빡이면 시야가 다시 돌아오는 데에 시간이 걸려 마치 그의 웃는 얼굴을 마음 속에 사진으로 찍어두는 것만 같다. 깜빡, 깜빡. 찰칵, 찰칵.
“안색이 안 좋잖아. 갑자기 왜 그래? 괜찮아?”
“조금, 두통이 와서요.”
“아……. 건강이 안 좋아져서 휴직한다고 했었지. 너무 무리한 거 아니야?”
“괜찮아요. 여기서 조금만 쉬면 괜찮아질 거예요.”
“여기 앉아봐. 기대.”
“네? 아니 그럴 필요까지는.”
“괜히 나 때문에 오늘 무리한 거 같아서 그래. 괜찮으니까 빨리.”
“손수건 더러워지잖아요.”
손수건을 꺼내어 나무뿌리에 깔고 앉혀 주는 쿠로오의 손길을 마다하려 했지만 옆에 털썩 앉아 제 어깨에 머리를 기대게 하는 것마저 거부할 수는 없었다.
“그러라고 있는 손수건인데 뭐. 제가 친절한 건 하루 이틀 있는 일이 아니랍니다?”
아. 그래. 이 상냥함에 반했었지.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남을 보살피는 데에 재주가 있는. 그러면서도 제 색을 잃지 않는. 이제 다시 보지 못할 그 다정함을 구태여 밀어내지 않고 받는 것쯤 어떠랴 싶다. 꼭 제가 아니더라도 다른 이들에게 대해졌을 상냥함인걸. 그래도 왠지 미안해 어깨에 기대기 전 그를 올려다보자 코앞에서 바로 마주한 미소진 얼굴에 그만 생각하고 만다.
아아, 이제 눈이 멀어도 좋아.
왠지 헤어지기 아쉬워 미적거리다 센코하나비(線香花火)를 하고나니 쿠로오씨가 도쿄로 돌아갈 막차는 이미 끊긴 후였다. 자취를 하고 있음에 다행이라 생각하며 쿠로오씨와 함께 집에 들어 간단하게 맥주를 마시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새벽녘에서야 잠에 들었다. 씻고 나와 잠들기 전까지는 차분한 머리가 아침이 되니 다시 하늘로 솟구친 것에 한바탕 웃으며 하루를 시작하고 다시 그가 도쿄로 돌아가는 기차까지 배웅을 하며 남은 마음의 미련이 거진 사라진 기분에 홀가분해졌다.
“연락할게. 또 보자.”
“조심히 들어가세요.”
죄송해요. 아마 이제 이게 마지막일 테죠. 아쉽다는 얼굴로 기차에 오르는 그의 얼굴이 흐리지 않아 다행이었다. 마지막 소원을, 욕심을 들어준 하늘에게, 믿지도 않았던 그 어딘가의 신에게 조용히 감사하며 출발하는 기차 안에서도 돌아보며 손을 흔드는 그에게 마주 손을 흔들어 주었다. 부디 안녕히. 이제 다시 나는 없던 것처럼 잊고 살아주길. 아니. 아주 이기적인 마음으로는 그래도 이 계절이 돌아온다면 나를 만났던 이 순간을 떠올려 주기를.
그래도 시력을 앗아가는 대신 마지막의 마지막 소원까지 들어주려는 것인지, 눈이 아주 멀기 까지는 하나의 계절이 더 지나고 난 후였다. 원하던 대로 계절 모두의 정취를 느끼고,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의 가장 멋진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제 다시 보지 못할 세상이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라 아주 보이지 않았을 땐 말도 나오지 않을 만큼 혼란스럽고 무서워 울기도 많이 했다. 한참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혼자 버려진 것 같다는 생각에서 겨우 한 걸음 빠져나왔을 때,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것들이 아름다운 것들 투성이라 이만 하면 되었다고 생각했다. 더 가지지 못할 것을 바라기 보다는 앞으로 닥칠 현실에 적응하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생각했다.
빨랐던 걸음이 느려져야 하는 것에 익숙해지고, 조금 더 예민해진 귀 때문에 시계초침 소리조차 고통스러운 시간이 지나 안내견과 함께 하는 외출에 산책까지는 가능해졌을 때쯤엔 겨울이 지나 어느덧 봄의 끝 무렵이었다.
자각 자각. 공원의 모래를 밟으며 걷는 소리는 그러려니 했지만 그 발자국 소리가 바로 앞을 지나 내가 앉은 벤치에 앉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보통 한 의자에 누군가 앉아 있으면 아무리 끝에 앉아 있다 한들 굳이 와서 앉지는 않던데. 낯선 이가 가까이 와서인지 무릎에 가까이 와 붙는 안내견을 더듬더듬 토닥여주곤 일어서는 찰나 이름이 불렸다.
“츳키.”
“누구세요?”
생각지도 못했던 부름에 화들짝 놀라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소리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들 정말 그 쪽에 있는지 정확하지도 않고 보이는 것도 아니지만 습관은 무서운 것이었다.
“우리들은 혈액이다!”
“아, 진짜.”
“와, 그 표정은 뭐야! 상처 받는다고.”
“정말, 이 나이를 먹어서까지 그걸 들을 줄은 몰랐네요. 부끄러우니까 더 하지 말아요. 누군지 알겠으니까. 정말 동네 창피해서 원.”
“……그렇게까지 두 번이나 부끄럽다고 말할 정도인거야?”
“……아니라고 생각해요?”
“에…….”
“무슨 일이에요. 여기까지.”
“보고 싶어서.”
내 차가운 말투와 빈정대는 표정에 낑낑대는 안내견에게 괜찮다고 말해준 뒤 다시 자리에 앉자 들리는 말에 말문이 막혔다. 생각지도 못한 장소, 바라지도 않았던 사람의 상상도 못할 말에 뭐라고 대꾸를 해줘야 하는지 감도 서지 않았다.
“사실 화내러 왔어. 난 작년 여름에 굉장히 좋았거든. 너랑 만나서.”
“…….”
“그런데 갑자기 연락도 데면데면해지고 나중엔 받지도 않아서 내가 뭔가 실수를 한 게 있나 싶었어.”
“…….”
“몸이 안 좋다는 게……. 이렇게까지 안 좋을 줄은 몰랐지. 왜 말을 안 해줬냐고 화내고 싶었는데 그건 또 아닌 거 같고. 그냥, 보고 싶어서 왔어. 궁금해서. 그 날 갑자기 왜 연락했던 건지. 배구했던 사람들한테 다 연락한 건가 싶었는데 그건 아닌 것 같고. 왜 나였는지.”
“그냥요. 어쩌다 연락이 닿은 사람이 쿠로오씨였을 뿐이었어요.”
“그냥…….”
“네. 그냥요.”
“난 기뻤는데. 너한테 연락 받은 날은 들떠서 잠도 잘 안 올 정도로,”
“왜요?”
“……그냥. 그냥 그랬어. 근데 츳키. 정말 내가 그 날 실수한 거라도 있는 거야?”
“아뇨……. 그런 게 있을 리가.”
“그럼. 정말 나랑 연락하기 싫어서 연락을 안 한 게 아니면. 다시 하자. 우리 가끔씩 보고 얘기도 하고 그러자.”
“…….”
이런 꼴을 하고 있는 게 안타까운 마음에 동정을 하는 건지. 솔직히 기쁘다기 보다는 그런 걱정에서 우러나온 짜증이 나 이 상황을 벗어나고만 싶은 조바심이 컸다. 꼴사나운 자격지심이라는 건 알지만 워낙에 좋은 사람이니 그럴 수도 있다는 마음에 쉽사리 대답이 나가지 않았다.
“그럴 필요 없어요.”
“츳키.”
“불편하실 거예요. 여러모로. 제가 싫어요.”
“내가 싫어?”
“아니,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안 불편하게 할게. 내가 뭘 잘 몰라서 실수하면 막 대놓고 화내도 돼. 아니, 화 내줘. 고칠게.”
“그러니까 왜 그런 수고를 쿠로오씨가 해야 되느냐고요.”
“계속 보고 싶었으니까. 계속, 계속, 계속. 보고 싶었던 사람이니까.”
“잠깐만요……. 그만해요……. 여기서 더 이러지 말아요.”
“주변에 아무도 없기는 한데. 옮기자. 너 편한 데로.”
“아 진짜…….”
“가자. 아님 네 시간이 안 되서 곤란한 거라면 내가 또 올게.”
“……가요, 지금. 덴버. 가자.”
“……아기공룡 덴버?”
“시끄러워요.”
“강아지 이름이 덴버야?”
“……네. 저기, 웃음 참을 거면 소리도 좀 어떻게 해주실래요?”
“큼, 흠. 근데 어디 가는 거야?”
“저희 집이요.”
“전에 내가 쓴 칫솔 아직도 있어?”
“버렸죠.”
“와. 진짜 너무해.”
사실 캡을 씌워놓고 찬장 한 구석에 둔 채였지만.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더 나올지 무섭고도 궁금해 쿵쾅거리는 심장에 자꾸만 이상한 표정이 지어질 것 같아 무표정을 가장하며 입술 안 쪽을 꾹 깨물었다. 그리고 그 날, 찬장 구석에 밀려나 있던 빨간색의 칫솔은 몇 개의 계절이 지나고 나서야 다시 주인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계절이 몇 바퀴를 지나도록 찬장 구석 한 켠의 칫솔은 계절만큼 색이 바뀌면서도 그 자리에 계속 자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