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에만 에어컨 하나 있는 집에서 산다 치고 여름밤의 정서를 다 때려넣고 버무린 쿨츳 보고 싶다.
에어컨이 고장났다. 연식이 오래된 낡은 맨션의 에어컨은 원래부터 조금 불안한 감이 없잖아 있었으나 공기를 식혀주는 기능에 문제는 없었다. 털털 거리는 소리가 났지만 그럭저럭 만족하며 관리에 소홀한 탓이었을까, 예고도 없이 에어컨이 작동하지 않았다. 한낮의 땡볕을 커튼과 에어컨에 의지하며 여름을 견디던 두 사람은 그 누구도 에어컨을 끄지 않았음에도 다시 꺼져 작동하지 않는 에어컨에 당황했다. 처음엔 누구 한 사람이 끈 줄 알았지. 츠키시마가 추워서 껐나? 쿠로오씨가 껐나?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다시 에어컨을 작동시키려 해보았지만 에어컨은 다시 켜지지 않았다. 리모콘에 건전지가 떨어졌나봐. 티브이 리모콘의 건전지를 다시 넣어봐도, 새 건전지를 다시 갈아끼워보아도 고장난 에어컨은 켜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이 분주히 몸을 움직이는 동안에도 서서히 집 안의 공기는 햇볕에 온도를 차츰 높이고 있었다.
...고장났나봐.
어떡하죠?
수리상에 전화를 해볼까.
오늘 토요일인데 할까요.
일단 해보고...
아... 이번 주엔 수리 예약이 다 차서 오기가 힘들대.
...아...
여름의 한 가운데에서 하필 고장이 나다니. 조그마한 가전이나 PC라면 모를까 이런 기계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두 사람은 난처할 따름이었다. 인터넷으로 찾아봐도 고장을 내느니 새로 사거나, 사람을 부르는 게 더 좋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고 두 사람은 다시 거실 바닥에 드러누웠다. 어느새 조금 갑갑해진 공기에 창문을 열까 생각했지만 한 뼘만큼 열었을 뿐이지만 그 사이로 확 밀려드는 찜통같은 열기에 츠키시마는 도로 창문을 닫았다. 에어컨이 꺼져 조금 올라간 기온이라도 밖의 열기에는 비할 게 못됐다. 온도차가 어찌나 나는지 바깥 공기가 반틈만한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올 땐 제가 연 것이 창문이 아니라 찜 솥의 뚜껑인 줄 알았다. 일말의 냉기가 가시기 전까지는 선풍기를 틀어 조금이나마 에어컨의 유작같은 공기를 연명시키는 것이 더 낫겠다는 판단이었다.
두 사람은 각자의 방에서 틀던 선풍기를 가져와 거실에 틀고 널부러졌다. 해가 중천을 벗어났음에도 도무지 가실 줄 모르는 더위에 두 사람은 결국 에어컨이 틀어져 있는 마트로 피신을 떠나기로 했다. 마트의 모든 물건을 전부 훑어보고 따져볼 기세로 오랜 시간을 머물러보았지만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한낮의 태양이 달궈놓은 아스팔트의 잔열은 밤공기마저 데우는 것이었다. 문을 닫고 나간 탓에 집 안이 더 더워져있자 어쩔 수 없이 창문을 모두 열어두었지만 어쩐 일인지 오늘은 바람조차 불지 않는 것 같았다. 저녁이 되도록 빗소리처럼 쏟아지는 매미소리가 어쩐지 더워 입맛까지 없었다. 텔레비전에서 시원한 풍경을 보아도 지금의 습한 공기와 온도가 더 몸에 달라붙는 것만 같아 그마저도 꺼버렸다. 계속 쥐고 있는 핸드폰이 뜨거워져 손에서 놓은 것은 두 말할 것도 없었다.
츳키, 나 심심해...
약속 없으세요 쿠로오씨?
없어. 츳키는?
저도 없어요.
저녁은 뭐 먹지... 소바?
면 끓여야하잖아요.
음... 그럼....
아무리 간단한 것이라고 해도 냉두부에 간장만 뿌려 먹을 것이 아니라면 모두 불을 써야하는 것이었다. 시켜 먹자니 뒷정리가 귀찮고, 결국엔 또 외식으로 더위를 피해보고자 합이 맞은 두 사람이었다. 평소엔 잘 먹지도 않는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비닐 봉지 가득 담아 달랑거리며 들어오니 그래도 이제 좀 살 것 같다. 는 무슨. 각자 방에 들어가자마자 좁은 방에 사람의 온기가 차자 금세 올라가는 체온에 두 사람은 결국 거실로 나와 바닥을 뒹굴었다.
방 안을 밝히는 형광등의 불빛마저도 더운 것 같아 거실의 불도 끄고 두 사람은 대야에 물을 떠 얼음을 넣고 베란다로 들고 왔다. 두 사람이 살지만 좁은 집에 대야가 두개씩이나 있을 필요는 없어 하나의 대야에 커다란 네 개의 발이 테트리스처럼 포개어져 들어갔다. 베란다 아래로 들어오는 거리의 불빛들만으로도 충분히 방안은 어슴푸레 보일 정도였다. 집에서 가장 큰 대야라고는 해도 평균보다 큰 두 사람의 발이 구겨져 들어가 있자 어딘지 가여운 모습이었다. 더운 건 더운 거고 차가운 건 또 차가운 것인지 발 끝만 넣었어도 얼음이 걸리자 금방 시려지는 온도에 발을 넣었다 뺐다, 손을 담궜다 뺐다를 반복하며 차가워, 더워를 반복하다 손과 발의 물기를 닦은 쿠로오가 잽싸게 수박화채를 만들어왔다. 예의상 도와주는 척이라도 할까 싶어 쿠로오의 동태를 살펴보던 츠키시마는 빠르게 생각을 접고 찰박찰박 혼자 차지하게 된 대야에서 발장난을 쳤다.
생각보다 길어지네 아무튼 내가 보고 싶은 건 씻고 나와서 거실에서 나란히 자려고 하는 두 사람인데 (급 생략) 더우니까 이불도 안 깔고 베개만 가져와서 나란히 누운 두 사람이 더우니까 뒤척뒤척 하는 비교적 긴 여름밤. 간간히 멀리에서 들려오는 매미소리와, 뒤척이는 옆 사람의 소리. 옆 집의 실외기가 돌아가는 부러운 소리. 그런 것들을 들으며 한 곳에만 누워있으면 바닥도 체온에 데워져 더우니까 옆으로 누워 시원한 곳을 찾고. 둘이 똑같이 바닥의 시원한 부분을 찾으려 뒹굴거리면 츠키시마의 손이 민소매만 입고 있는 쿠로오의 팔뚝에 닿게 되는 거. 선풍기를 틀어놨다고 해도 더운 공기에서 바람만 불게 해주는 정도여서 뜨거운 츠키시마의 손이 쿠로오의 팔에 닿았는데 시원해서 어, 쿠로오씨 시원하네요. 하고 잡는데 쿠로오가 안 그래도 덥고 습한데 사람 손이 닿으니 으윽Wㅁㅠ 하고 더워서 울상 짓는데 가만히 있으니까 츠키시마가 아예 양 손으로 쿠로오 팔 잡아서 그제야 힘없이 팔을 움직여서 빼려고 하는 거.
츠키시마가 웃으면서 손을 떼니 쿠로오도 옆으로 돌아 누워 장난친다고 츠키시마 팔 잡고. 너도, 여기는 시원할 걸. 그 말대로 쿠로오의 손이 츠키시마의 팔에 닿으니 화끈거릴 정도로 쿠로오의 손이 뜨겁게 팔에 닿는 느낌에 아아! 짜증을 내며 츠키시마가 팩 팔을 저어 떨어뜨리겠지. 츠키시마의 즉각적인 반응에 쿠로오도 킬킬 웃으며 바로 손을 거두고 누워 눈을 감음. 선풍기 바람에 팔락이는 쿠로오의 민소매에 드러난 팔이 시원해보여 츠키시마는 다시 잡아보려다 말고 아쉬워 하겠지. 아까 얼음물에 발이며 손을 담그고 있을 때는 좋았는데. 아까 화채까지 해 먹어서 남은 얼음도 없고. 다시 뒹굴 뒹굴.
시원한 바닥을 찾아 뒹굴거리던 두 사람이 또 가까이 붙었을 때. 츠키시마는 안경을 벗어 흐린 눈으로 앞에 누워 눈을 감고 있는 쿠로오의 얼굴을 보았다. 자동차가 지나갈 때마다 헤드라이트의 불빛이 희미하게 쿠로오의 이목구비를 희고 가는 선으로 덧그려주었다. 차분하게 내려가 있는 쿠로오의 앞머리가 콧대에 걸려 있는 것이 조금 간지러워 보여 츠키시마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해 조금 멍한 머리로 생각없이. 쿠로오의 앞머리를 살금 걷어 정리해주자 감겨있던 쿠로오가 눈을 뜨고 미소짓는 얼굴에 츠키시마가 나쁜 짓이라도 한 것 마냥 뜨끔 놀랐다. 왜. 잠이 안 와? 아뇨. 자야죠. 쿠로오가 눈을 뜰 줄은 몰라 깜짝 놀란 츠키시마가 다시 돌아누워 어쩐지 두근거리를 심장께를 잡고 눈을 꽉 감았다.
애써 선풍기가 돌아가는 소리며 다른 생각을 하려 애쓰자 어느새 살짝,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얼마간을 잠들었을까. 온몸이 화끈거리는 기분이 들 정도로 덥고 목이 말라 츠키시마는 찡그리며 눈을 떴다. 완전히 밤공기에 잠겨 어두운 거실에 냉장고의 주황 불빛이 부채꼴로 퍼져있었다. 부스스 츠키시마가 일어나자 냉장고를 열어 물을 따르던 쿠로오가 인기척에 돌아보고 사과했다. 미안. 나 때문에 깼어? 아뇨, 저도 목 말라서요. 쿠로오의 옆으로 아직 졸음이 깨지 않은 걸음으로 비척비척 다가가자 쿠로오가 따라놓았던 보리차를 먼저 츠키시마에게 건넸다.
바싹 말라있던 식도를 타고 위까지 차가운 보리차가 내려가는 느낌이 선연했다. 쿠로오가 물을 마시느라 아직 넣어놓지 않았던 물병에서 조금 더 컵에 따라 마시고 눕자 물로 찬 배가 딩딩해 조금 잠이 깬 느낌이었다. 물이 살짝 목 끝에 걸려 있는 느낌에 바로 누웠던 자세를 옆으로 고쳐 누웠다. 그리고 품이 큰 반팔티 소매 안쪽으로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쿠로오의 손이었다. 조금 놀라 눈을 뜨자 재미있다는 듯 웃고 있는 쿠로오의 얼굴이 보였다. 시원하지. 시원한 게 아니고 차가운 거였지만. 반박을 하려다 기운이 빠져 츠키시마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었다.
더워서 잠이 잘 안 와. 아까처럼 머리 쓰다듬어 주면 안돼? 쿠로오가 츠키시마에게로 조금 더 가까이 왔다. ...저도 자야되는데요. 말은 그렇게하면서도 츠키시마는 조금 망설이다 눈을 감고 있는 쿠로오의 이마로 손을 옮겼다. 조금만. 쿠로오는 머리칼을 빗어주듯 움직이는 츠키시마의 손가락에 머리를 들어 비볐다. ...고양이 같아. 손가락 사이로 흩어지는 부드러운 머리카락과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띈 얼굴로 눈을 감고 있는 쿠로오가 금방이라도 그르릉, 목을 울릴 것 같았다.
일정하게 쿠로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고 있자니 살며시 밤바람이 불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돌아가고 있는 선풍기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엔 여름 냄새가 묻어있었다. 살그머니 졸음이 몰려와 가물거리며 감기는 츠키시마의 시야 사이로, 츠키시마의 손을 내려준 쿠로오가 성큼 다가왔다. 츠키시마, 생각해봤는데 말이야. 네. 시원한 데가 또 있는 것 같아. 응?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더위와 졸음에 잠겨 멍한 츠키시마의 반응이 더디 돌아오자 빙글빙글 웃고 있던 쿠로오가 고개를 빼들고 츠키시마에게 가벼운 입맞춤을 남겼다. 차가운 물을 마신 입술이 미지근하게 닿는 온기에 츠키시마는 깜짝 놀라 잠이 오던 머리가 확 깼다. 어때? 놀라 입술을 가린 츠키시마의 손등 위에 다시 한 번 짧게 입술을 부딪힌 쿠로오의 얼굴에 츠키시마는 어딘지 머리가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꿈을 꾸는 것일까? 어디에서부터, 꿈인 거지? 생각이 그치기도 전에 츠키시마는 몸이 먼저 고개를 도리도리하고 있고 쿠로오가 안심하면서 진짜 키스하는 거 보고 싶어..... 꿈이 아니라면 분명 이건 더워서 뇌가 녹은 거라고. 그래서 이상해진거라고 생각하면서 쿠로오랑 키스하는데 사실 자기도 모르게 쿠로오 좋아하고 있던 츠키시마랑 언제 낚아야 하나 계속 간보고 있던 쿠로오랑 여름밤 같이 뒹굴던 거실에서 찐하게 더 뒹굴고 사귀는 거 보고 싶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