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크림빵님

- 화가 쿠로오x온나카타 츠키시마 썰 기반 글입니다.





아무리 여름이 지나가 가을에 들어섰다고 해도 종종 열대야가 찾아오는 밤이 있었다. 오늘이 바로 그러한 날이었다. 산바람이 아무리 시원하다지만 뒤늦은 열대야에 산 이 곳 저 곳을 헤매고 돌아다닌 테츠로는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하지만 더위에 재료 찾는 일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최근 마을에 유랑극단이 섰다. 그 극단의 온나가타의 미색에 최근 미인도의 수요가 늘었다. 온나가타가 주로 걸치는 붉은 염료의 수요 역시 급증해 물감 파는 일을 하는 쿠로오가 붉은 염료를 구하려 주목 열매를 찾아다녔다. 유난히 물감의 색을 잘 뽑아내는 쿠로오의 물감은 그 외에도 잘 팔리는 것들이었지만 주목의 열매로 만든 붉은 빛은 맑고 변색이 잘 되지 않아 화가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시기가 좋았다. 주목이 한참 열매를 탐스럽게 맺을 가을에 그 유랑극단이 찾아온 것은. 겨울이 되어 염료의 재료가 별로 없어 물감도 잘 팔 수 없을 때를 대비해 산천초목이 풍성할 때 많이 벌어놔야 겨울을 날 수 있었다. 쿠로오는 잘 팔리지 않는 화가였다. 사람들은 그의 색을 좋아했지만 그의 화풍엔 고개를 갸웃했다. 어딘지 애매한 느낌이 든다는 것과 익숙하지 않은 특이함에 불편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무언가 끌리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고들 사람들은 말했다.


나름 화공이라는 이름에 자부심을 가지고 언젠가는 그림만을 그려 내세웠을 때가 있었다. 제가 사용할 만큼의 물감만을 만들어 팔지 않은 채 그리고 또 그렸다. 사람부터 풍경, 소설의 삽화며 손대보지 않은 것이 없었지만 그의 그림은 잘 팔리지 않았고 그의 그림을 삽화로 써주던 글쟁이마저 마을을 떠나자 쿠로오의 수익은 거의 없다시피 했었다. 배를 곯다 굶어 죽기 직전인 그를 보다 못한 친우가 그가 남긴 물감을 팔아 먹여준 미음에 쿠로오는 허겁지겁 달려들었다. 일정 기간 동안 먹을 수 있는 식량을 사고도 남는 돈을 건네 받은 쿠로오는 그 뒤 붓을 손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친구가 사준 식량이 떨어져갈 쯤 쿠로오는 일어나 망태를 들었다. 쿠로오가 조색한 물감은 여전히 잘 팔렸다.


들고 온 주머니 가득 주목 열매를 따고 근처에 있던 물가에서 땀기나 씻어내고자 물소리를 따라 쿠로오가 발걸음을 옮겼다. 폭포가 보이자 무르기 쉬운 열매가 뭉그러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주머니를 내려놓다 쿠로오는 눈앞에 보이는 절경에 움직임을 멈추었다. 처음엔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온 것인 줄로만 알았다. 작은 폭포가 쏟아지는 물결 위로 금목서 꽃잎이 송이 송이 떨어져 흐르고 있었고 나카쥬반만을 걸친 미인이 그 물을 천에 적셔 얼굴을 닦아내고 있었다. 달빛에 푸르게 빛나는 풍경 속 흐드러진 꽃내음과 그림에서 튀어나온 것만 같은 아름다운 얼굴. 흰 분이 얼굴에서 지워져도 뽀얀 얼굴이 온통 예쁘라고 작정한 세공품 같았다. 한 폭의 그림이 눈앞에 펼쳐진 듯 장관이었다.


곱게 빗어 틀어 올린 머리를 지탱하고 있던 비녀들이 하나씩 내려오고 달빛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반짝이는 머리칼이 풀어져 내리는 것을 바라보다 쿠로오는 문득 치켜 올린 옆얼굴이 익숙함을 느꼈다. 한 번도 직접 연극을 보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지금 장안에 소문이 파다한 그렇게도 미색이 뛰어나다는 그 온나가타였다. 모든 그림가게에 간판처럼 걸려있는 미인도의 주인공. 왜 그리도 그를 보고 온 모든 이들이 하나 같이 그 아름다움에 취해왔는지 쿠로오는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미인도란 본디 좀 더 그 인물을 미화시켜 그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건만 소문과 그림이 무색하리만치 그 모든 칭송을 뛰어넘는 아름다움에 쿠로오는 말을 잃고 그 절경을 마음에 담는데 여념이 없었다.


걸치고 있던 기모노 자락을 내리는 손동작이 별 거 아님에도 쿠로오의 시선을 빼앗았다. 누군가 지켜보는 줄도 모른 채 내려가는 옷자락에 가려져 있던 뽀얀 어깨의 능선이 드러나자 그제야 쿠로오는 나쁜 짓을 저지른 것 마냥 황급히 몸을 돌려 시선을 돌렸다. 얼굴 뿐 아니라 몸을 이루고 있는 선 모두가 고운 사람이었다. 살짝 드러나 보였던 판판한 가슴이 여인네가 아님을 알게 해주었지만 그럼에도 항간에 이름을 날리고 있는 여인들보다 더 아름다웠다. 푸른 풍경 속 달빛을 형상화해 놓은 듯한 미인. 고이 접어두었던, 하지만 한 번도 포기해본 적 없었던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욕구가 화산이 폭발하듯 범람했다. 뜨겁게 용솟음치는 욕구에 쿠로오는 소중히 다루던 열매 주머니마저 아무렇게나 쥔 채 한달음에 마을로 다시 내려와 붓을 잡았다. 지금 보았던 아름다운 풍경을 어떻게든 그림으로 담고 싶었다.


기존에 팔리던 붉은 기모노 차림일 뿐인 미인도가 아닌 새로운 색감의 미인도가 그림 가게에 걸렸다. 파란 풍경 속 하얀 기모노를 입은 채 달을 바라보며 목욕을 준비하는 미인도의 그림은 그 색감과 색다른 구도에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쿠로오는 처음으로 물밀 듯이 들어오는 그림 주문에 물감을 만드는 것이 아닌 그림을 그리느라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즐거웠다. 그리고 싶은 것을 그렸고 그 그림에 대해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하는 것이 아닌 끄덕이며 감탄을 보내는 것이 신기했다. 처음으로 물감이 아닌 그림으로 인정을 받았다는 것이 이렇게나 기쁜 일이 될 줄은 몰랐다. 더 이상 이미 그렸던 미인도가 아닌 다른 모습의 미인도를 요청이 들어왔다. 기존의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될 때, 테츠로는 방안에 누워 다시 한 번 그 날의 정경을 떠올려 보았다. 너무 되감아 떠올린 풍경은 어딘지 그 색이 바랜 듯 희미하고 꿈결처럼 아득해진 것이었다. 다시 한 번 그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면. 쿠로오는 아무리 다시 떠올려 보려 해도 다시 잘 기억나지 않는 온나가타의 얼굴이 안타까워 눈을 질끈 감았다.


아름답고도 아름다웠다. 그것 외에는 별달리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다른 그림을 그려보려 해도 자꾸만 멀어지는 기억이 아쉬웠다. 한 번만. 다시 한 번만 그 달빛과도 같은 미색을 바라볼 수 있다면. 참을 수 없는 충동에 쿠로오는 기어이 유랑극단의 연극표를 구입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는 연극의 인기만큼 표를 구하기도 어려웠다. 당일 연극표는 당연히 구할 수 없었으며 암표상들은 부르는 게 값이었다. 무대 바로 앞, 아름다운 배우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자리는 서민들은 큰마음을 먹어야만 지불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그 돈이라면 몇 주는 먹고 살 수 있을 만큼의 금액. 쿠로오가 겨우 구할 수 있었던 것은 2층의 끝자락에 있는 구석진 자리였다.


겨우 배우들이 두 손가락을 합친 것만큼 작게 보일 거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미색을 가릴 순 없었다. 저번에도 느낀 것이지만 비단 얼굴의 생김새 뿐 아니라 몸을 이루고 있는 곡선이나 동작 하나하나가 주변에선 쉽사리 찾아볼 수 없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었다. 높은 귀족 어르신들을 접할 일 없는 쿠로오로서는 귀티가 난다거나 품위 있는 행동이라는 것은 잘 알지 못했지만 아마도 그들의 품위 있는 동작들도 저 온나가타만은 못할 것이라고 감히 생각이 들만큼의 우아함이었다.


그렇게 느끼는 것은 쿠로오만은 아닌 듯 하늘하늘 움직이는 온나가타의 춤사위며 연기에 객석에 여기저기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미처 가다듬지 못한 채 무의식적으로 탄식까지 내뱉게 하는 아름다움이었다. 하지만 쿠로오가 바라던 그 첫 인상 만큼의 강렬함으로 다가오는 것은 아니었다. 분명 아름다웠다. 짙은 화장이 어색하지 않은 고운 얼굴은 멀리에서 보자면 조금 키가 크다 뿐이지 여인으로 착각할 만큼 섬세한 선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작정하고 꾸며놓은 듯 화려한 장신구들은 그를 한층 더 풍성하게 만들어주었다. 주렁주렁 달린 장신구들이 무색하게 가볍고 부드러운 동작으로 움직이는 몸짓은 마치 나비의 날갯짓과도 같았다. 하지만 무언가가 부족했다. 그것은 거리가 멀어 자세히 보지 못한다는 안타까움은 아니었다.


붉은 천에 휘감겼다 풀어지며 흰 나카쥬반이 드러났을 때 갑자기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조명 몇 개가 꺼진 것인지 그가 있는 얼굴 아랫부분의 빛이 사라졌다. 무대 위가 온통 밝은 가운데 그 혼자만이 마치 어둠을 입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금세 다시 불이 켜지고 아주 잠시간 멈춰있던 그 역시도 연기를 이어나갔다. 그 찰나의 어둠, 느릿하게 깜빡이던 눈. 마치 어둠에 스러질 것만 같던 모습. 쿠로오는 연극이 끝나고 난 뒤 그런 것들을 화폭에 담았다.


긴꼬리제비나비를 연상케 하는 검은 기모노자락에 휘감긴 처연한 온나가타의 모습. 판에 박힌 미인도들 사이 쿠로오의 그림은 독보적으로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수요가 늘어나자 그의 그림을 판화로 만들겠다는 목판화공의 제안까지도 들어왔다. 그의 예전 그림마저도 재조명 받으며 극찬을 받았다. 혹자는 배경과 인물을 한데 그려 넣어 인물에 집중이 되지 않는 산만한 그림이라며 그의 미인도를 혹평했으나 쿠로오는 별다른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그저 제 머릿속에 들어찬 그의 아름다움만을 다시 한 번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을 뿐이었다.


기억이라는 것은 왜 이리도 짧고 변색되기가 쉬운지. 기억을 그림에 옮겨 담는 것도 아니건만 그림을 그리며 기억하려 애쓸수록 그의 형체는 희미해져만 갔다. 그를 회상해가며 그리는 그림들이 점점 더 추상적이 되어갈 쯤 쿠로오는 다시 붓을 내려놓았다. 혹시라도 지나치는 얼굴이나 볼 수 있을까 극단 근처를 기웃거려보아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수상한 자가 기웃거린다는 신고를 받고 쫓겨나기도 부지기수였다.


유랑극단의 온나가타를 그린 그림을 보고 다른 미인의 미인도도 그려달라는 요청이 쇄도했지만 아무리 날고 긴다는 미인들을 보아도 쿠로오에게 그 온나가타 만큼이나 머리를 스치는 그리고 싶다는 강렬한 감각은 들지 않았다. 내키지 않지만 마지못해 그렸던  새로운 화풍의 미인도는 잘 팔리는 것이었지만 쿠로오의 성에 차지 않았다. 잘 팔리고 칭송을 받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것이라고 생각했건만 그런 것이 무색하게 쿠로오는 영감이 떠오르지 않음에 안타까웠다.


그려 달라 요청이 들어오는 것들을 모두 무른 쿠로오는 다시 물감 재료를 구하러 산을 돌아다녔다. 그가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만족스러운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무엇을 그린들 하나 같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뿐인데 더 그릴 이유는 없었다. 한 번이라도 원하는 그림을 마음껏 그려볼 수 있었다면 그걸로 되었다고 쿠로오는 생각했다. 유랑극단의 배우는 언젠간 이곳을 떠날 것이 정해져 있는 이였다. 그가 떠오르지 않는다고 해서 그려지지 않을 그림이라면 더 욕심이 나기 전에 그만두는 것이 맞았다. 아마도 이것으로 화가로서의 제 삶은 다 한 것이지 않을까. 그를 만나지 않았다면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을지도 몰랐을 것을 그려본 것만으로도 족했다. 쿠로오는 덤덤히 필요한 재료가 무엇이 있는지를 가늠했다. 쪽의 꽃이 두 번째 질 즈음이었다. 달개비들도 이젠 꽃을 피우지 않을 때가 되었으니 이 때 바짝 쪽과 달개비를 채취해 두어야 겨우내 푸른 물감을 만들어 쓸 수 있었다.


허리를 굽히고 계속해서 산을 오르다 뻐근하게 저려오는 통증에 상체를 뒤로 젖히고 몸을 쉬여주려는데 눈에 들어오는 절벽 위에 인영이 하나 들어왔다. 다리를 암벽 아래로 내리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마른 인영. 쉽게 보지 못하는 체형과 분위기에 쿠로오는 단번에 제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그 온나가타임을 알 수 있었다. 마른 몸이 바람에 휘청거리는 것이 위태로워 보였다. 저 곳은 유난히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돌개바람이 극성인 곳이라 현지 사람들은 자주 올라가지 않는 곳이었다. 몸을 가눌 수도 없게 휘몰아치는 바람에 사람이 많이도 떨어져 죽었다고 했다. 듣기로는 귀한 약재들이 자라고 있어 심마니들이나 종종 오르는 곳인데 그마저도 떨어져 죽은 이가 수십이었다. 쿠로오는 더 잴 것도 없이 절벽으로 달려갔다.


제발 무탈하길. 아무 일 없길. 혹여 일어서다 발이라도 헛딛지 않기를. 다급하게 쿠로오가 절벽에 올랐을 때 온나가타는 아예 절벽 끝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순간 세찬 바람이 휘몰아 쳤다. 아래로 내리 꽂는 듯한 바람에 마른 몸이 휘청거렸다. 금방이라도 절벽 아래로 떨어질 것만 같은 위태로움에 쿠로오의 심장이 먼저 저 아래로 떨어지는 듯 간담이 서늘했다. 안 돼. 아니 된다. 제대로 뛰고 있는지도 모른 채 다급하게 손이 먼저 뻗어졌다. 쿠로오는 닥치는 대로 그 허리를 당겨 안고 자세를 낮추어 앉았다. 품 안에서 놀란 듯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치지 않을 것 같은 바람이 멎고 행여 고운 몸에 생채기라도 났을까 이리저리 살펴보니 다행히 다친 곳은 보이지 않았다.




“떨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리 절벽에 가까이 서계신 겁니까.”


“아...”


“돌개바람이 극성인 곳입니다. 위험해서 마을 사람들도 자주 오지 않는 곳인데 어찌...”


“떨어졌어도 상관없었을 텐데...”


“예?”


“걱정해 주신 것은 감사하지만 더 신경 쓰지 않아주셨으면 합니다.”




방금 정말로 떨어져 죽을 수도 있었던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아무렇지도 않은 무표정에 억양이 없는 목소리엔 생기가 없었다. 인형이 겨우 사람의 말을 하는 것만 같은 건조하고 메마른 느낌. 달빛을 받아 빛나던 그날 밤과는 또 다른 버석한 느낌에 쿠로오의 가슴이 시렸다. 금방이라도 스러져 사라질 것만 같은 느낌. 어째서. 이리도 아름다우면서도 사그라지는 빛줄기만큼 가냘픈 얼굴을 하고 있는지. 제 걱정마저도 등진 채 다시 절벽 너머로 시선을 돌리는 뒷모습이 한없이 위태로워 보였다. 지금 이대로 자신이 등을 돌려 내려가는 길에 당장이라도 몸을 던져 떨어질 것만 같은 느낌에 쿠로오는 쉽게 걸음을 뗄 수 없었다.




“목숨을 끊을 작정이셨습니까.”




모처럼의 한가한 시간에 그 누구와도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아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아온 츠키시마였다. 이런 대화조차도 내키지 않아 조금 짜증스런 기분이 되어 말을 거는 사내를 쳐다보니 울 것만 같은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곧은 시선과 마주쳤다. 어째서 모르는 이의 일에 이토록 안타까운 표정을 할 수 있는 것인지. 츠키시마는 의아해졌다. 그리고 그 진심 어린 표정에 날이 서있던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어차피 한 번 스쳐지나갈 인연인 것을요. 어찌하여 이리 걱정해주시는 지는 모르겠지만 더 마음 쓰실 것 없습니다.”


“아니 됩니다. 죽는 것은... 그것만은...”


“...”


“죽지마세요....”




한 치의 거짓이 담기지 않은 것 같은 절박함. 연기로 꾸며낸 얼굴이라기엔 너무나도 절실해보였다. 지금 저 치의 앞에서 제 시커먼 내면을 드러내보인다면 금방이라도 무너져 울 것만 같을 정도로. 무언가 제게 얻을 것이 없는 사람에게서 이런 걱정을 받아본 적이 있던가. 다 죽어가는 것 같은 얼굴로 죽지 말라 청하는 남자 어쩐지 우스웠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죽지 말라는 것만 반복하며 정말로 떨어지지 못하게 할 작정인지 츠키시마의 소맷자락을 쥐고 놓지 않는 사내의 손아귀 힘이 제법 셌다. 죽지 않겠다는 말을 들을 때까지 놓지 않겠다는 듯 간절하게 바라보는 눈빛에 결국 츠키시마의 아집이 꺾였다.




“꽃을... 보고 있었을 뿐입니다.”


“꽃?”


“저 아래에 꽃이 소담스럽게 피어 있기에.”


“꽃을 좋아하십니까?”




꽃을 보고 있었다는 말에 그제야 안심이라는 듯 남자가 활짝 웃었다. 참 꾸밈이 없는 얼굴이로구나. 이토록 생각하는 것이 그대로 표정으로 드러나는 사람은 참으로 오랜만인지라 츠키시마의 시선이 남자에게 계속 머물렀다. 꽃을 좋아하냐는 물음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가 조심스레 여즉 잡고 있던 소맷자락을 좀 더 잡아 당겼다. 좋은 구실이라는 듯, 아이에게 사탕을 주며 꾀는 듯 부드럽고 달콤한 음성이었다.




“이곳은 꽃을 보기에는 너무 위험합니다. 더 좋은 곳이 있으니 저와 내려가시지요.”




사내는 정말로 제가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인지, 죽지 않을 것이라는 대답을 해주지 않아 불안한 것인지 저와 내려가기를 종용했다. 평소 같았다면 모르는 이에게 이토록 대답을 해주지도, 따라가는 일도 없었겠지만 이 사내는 위험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적부터 많은 일을 겪고 사람을 상대해온 츠키시마는 사람을 보는 눈이 제법 약았다. 누가 제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지, 무엇을 바라고 제게 다가오는지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지 파악이 빨랐다. 그리고 대체로 츠키시마가 사람을 보고 느낀 첫인상을 거의 모두 들어맞는 것이었다. 오늘 처음 만난 낯선 이지만 그의 말을 따라서 나쁠 것은 없다는 판단이 섰다. 그의 뜻에 따르고자 그가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기자 쥐고 있던 소맷자락을 놓고 앞장서는 사내의 신난 얼굴은 참 주변에서 보기 드물게도 순수해보였다. 세간의 때를 탈만큼 탔을 정도의 나이를 먹은 것 같은데, 나이에 맞지 않는 순수함이나 가감 없이 생각이 드러나는 이가 조금 궁금해졌다. 왜 이리 저에게 신경을 쓰는지. 친절을 베푸는지.


생각했던 것보다 외진 길을 걸어갈 때에는 조금 괜찮을까 싶은 걱정이 들었지만 그가 수풀을 걷고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몸을 물리는 건너의 풍경에 츠키시마는 걱정을 잊고 감탄사를 흘렸다. 이제 막 만개에 가까워진 꽃무릇의 군락지가 붉게 물결치고 있었다. 꽃무릇의 붉은 밭 뒤로는 구절초와 개망초가 희게 피어 꽃무릇의 붉은 빛을 한층 더 돋보이게 해주었다. 녹음에 대비되는 꽃물결에 츠키시마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것을 보는 쿠로오의 얼굴에도 기쁨이 피어올랐다.


천천히 꽃무릇 사이로 걸어가 구슬 같은 꽃술 끝에 닿는 손가락이 고왔다. 그리고 그것을 보며 미소 짓는 얼굴은 더 아름다웠다. 역시 바스라질 듯 사라질 것만 같은, 가공되어진 인형 같은 얼굴이 아닌 생기가 도는 맑은 얼굴은 그다지도 쿠로오의 마음속을 가득 알 수 없는 감정으로 채워주는 것이었다. 분이나 과한 장신구가 없이도 이리 아름다운 것이거늘. 화장기 없는 피부며 입술이 산이슬에 젖은 꽃잎보다도 맑았다. 아름다운 자연과 그보다도 아름다운 이가 어우러진 풍경. 쿠로오가 보고 싶던 그 절경이었다. 마치 예쁘라고 작정하고 만들어 놓은 것만 같은 이는 인위적인 모습보다도 이런 것이 더 잘 어울렸다. 당장이라도 이 모습을 화폭에 담고 싶어 쿠로오의 손이 근질거렸다. 저 상사화를 꺾어 머리장식으로 꽂아두고 꽃을 한 아름 안아 향기를 맡는 눈을 감은 모습이 절로 상상이 갔다. 탐스럽게 피어난 꽃 한 가지 꺾어다 저 머리 위에 얹어 줄 수 있다면. 아직 그런 접촉을 쉬이 할 사이도, 명분도 없음이 쿠로오는 조금 아쉬워졌다.




“예쁘네요.”


“네, 정말...”




이보다 더 예쁠 수 없을 만큼 아름답습니다. 분명 츠키시마는 꽃을 보고 말한 것이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그 주체가 다른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이질감에 츠키시마가 쿠로오를 돌아보자 역시나 꽃이 아닌 저를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 있었다. 멍하게 꿈결을 거니는 표정으로는 응시하다가 시선이 마주치자 급히 정신을 차린 듯 사과를 하고 허둥대는 모습에 츠키시마의 입가에 다시 웃음이 걸렸다. 아, 그저 또 이 겉모습에 홀려 쓸 데 없는 마음을 준 것이었구나 알아차렸지만 이토록 제게 반했다는 것을 감추지 못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아름답다거나, 어여쁘다거나, 그런 말들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온 말이지만 지금 눈앞의 사내에게서 전해 듣는 말은 어딘지 신선했다. 제 머리칼을 스치고 지나는 바람이 마음에 불어오는 듯 가벼운 설렘이 이는 투박한 표현.


해가 저물고 연극이 시작될 시간이 되어 산을 내려와 분장을 하면서도 츠키시마는 계속 서툴던 사내의 눈빛이 생각났다. 마을입구까지 고이 바래다주곤 못내 헤어짐이 아쉽다는 듯, 보내기 싫다는 것처럼 보였던 얼굴. 화장을 지운 채로 아무런 꾸밈없이 그토록 누군가와 오래 대화를 나누고 함께 있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단장의 지시로 누군가의 접대를 할 때에도, 연기를 할 때에도 츠키시마는 늘 짙은 화장 뒤에 표정과 진심을 가린 채였다. 그 외에는 아무도 다가오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단장의 감시 하에 츠키시마는 철저하게 혼자였다. 몰래 마실을 나가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츠키시마 역시도 사람이 지긋지긋해 굳이 단장의 압력이 아니더라도 다른 이와의 접촉을 꺼렸었다.


흐드러지게 피어있던 꽃들과 순수하던 이의 웃는 얼굴. 이름이나 여쭈어 볼 것을 그랬던가. 좋은 구경을 시켜준 이에게 감사의 인사로 웃어보이자 직전에 보았던 꽃무릇만큼이나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던 것이 귀여웠다. 가진 재산만을 믿고 오만방자하기 짝이 없는 능구렁이 같은 것들이나 단장의 눈치에 제대로 말도 걸지 못하는 아랫것들만을 접하다 이리 순박한 이를 본 것이 언제인지. 제법 나쁘지 않은 산책이었다. 은은하게 입가에 걸렸던 미소도 잠시, 입술의 붉은 연지가 다 그려지고 화장을 끝낸 츠키시마는 다시금 인형의 얼굴로 돌아왔다. 무대가 끝나고 난다면 어딘가의 높은 분과의 연회에 가야한다고 했다. 다음 날에도, 그 다음 날에도 츠키시마가 받을 손님들은 많았다. 아마 한동안은 또 갇혀 지내야할 테지. 지긋지긋한 연극이 다시 시작될 때였다.




“저기...”


“!!”


“죄송합니다! 그, 저, 놀라게 해드리려 한 것은 아니었는데... 죄송합니다!”


“아...”




유난히 고달픈 밤이었다. 어느 정도 술기운이 오르자 단장이란 작자는 저를 산 남자가 웃돈을 얹어주자 미련 없이 계집을 끼고 방을 나섰고 저는 뱀 같은 눈을 가진 소름끼치는 작자에게 넘겨졌다. 아름다움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던 남자는 그 사탕발림에도 제가 별 반응이 없자 이내 천한 것이 비위 하나 맞출 줄을 모른다며 머리채부터 쥐어왔다. 손버릇이 좋지 못한 치였다. 돈으로 직위를 샀다더니 천한 버릇은 팔아버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제 직위와 돈을 거들먹거리는 것이 통하지 않자 바로 길길이 날뛰는 꼬락서니가 사나웠다. 그 추함에 더 비위를 맞춰줄 마음이 사라져 더 고집을 부렸던 잘못은 인정한다. 요 사이 체통을 지킨다며 점잔을 빼던 늙은이들만을 상대하다 오랜만에 험한 꼴을 당한 몸이 힘들었다. 억지로 열린 몸은 깊숙한 곳까지 욱신거렸고 뒤에서 강제로 휘어 잡힌 어깨며 팔이 온통 아팠다. 바닥에 쓸린 무릎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향유며 잡다한 것을 넣어둔 욕조가 저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지만 그런 것보다는 조용한 물소리며 풀벌레 소리 속에 잠겨 있고 싶었다. 여기 저기 많은 곳을 떠돌았지만 예술가들이 많이 모여 산다는 이 마을은 감수성 예민한 자들의 터전답게 풍경이 유독 좋았다. 잘 보지 못했던 꽃들이며 새들이 많았다. 우연찮게 알게된 폭포의 아랫부분엔 온천이 솟는지 따뜻한 물이 고인 곳이 있었다. 저를 다시 극단으로 데려갈 심부름꾼에게 몇 푼 쥐어주고 보낸 뒤 몰래 그 곳에서 지친 마음을 쉬일 생각이었다.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다리를 겨우 갈무리해 천천히 숲길을 걷는데 불쑥 튀어나온 검은 인영에 츠키시마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돈을 받고 아래에서 기다리기로 한 심부름꾼이 다시 저를 잡으러 온 줄만 알았다. 하지만 힘이 풀려 넘어진 저를 급히 일으켜주는 이는 이전에 절벽에서 보았던 사내였다.


좀 전까지도 제 몸을 탐하던 다른 이의 손길이 생각나 반사적으로 뿌리치려했지만 긴장이 풀린 몸은 쉽게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부축해주는 손길에 몸을 맡기는데 한 없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편하게 나무에 기대게 해준 남자가 손수건을 꺼내어 이마를 닦아주는 것이 느껴졌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들썩이는 숨결에 안절부절 못하는 얼굴에 안심이 되는 것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괜찮으십니까.”


“예...”


“술을 얼마나 드신겝니까. 이리 냄새를 풍기시고.”


“...”


“이리 밤이 깊었는데 이런 몸으로 또 어딜 가시려구요. 또 위험한 곳에 가실 작정이셨습니까? 발이라도 헛딛으셔 다치기라도 하시면 어쩌려고요. 밤이 깊어 다음 날까지는 사람들도 잘 지나다니지 않은 터인데.”




부모에게서도 받아보지 못한 잔소리를 알지도 못하는 사내에게 듣는 것이 우스워 츠키시마의 입에서 픽 웃음이 새어나왔다. 낳고 길러준 아비라는 것은 제 새끼를 팔아 돈을 받아 챙기기 바쁜데 이름도 무얼 하는지도 모르는 이가 마치 제 배 아파 낳은 새끼에게 하는 것 같은 걱정을 하다니 우습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제게 다가오는 이 다정함이 싫지 않았다. 올곧게 저만을 바라보는 것 같은 눈빛, 걱정 어린 따뜻한 손길. 난폭함이란 찾아볼 수도 없는 너무 조심스러워 간지러울 지경인 손에 츠키시마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기댔다. 누군가 저를 만지는 게 싫었던 주제에 다정하게 어루만져주는 손길이 그리웠던 것만 같았다.




“이 근처에 있는 천에 가는 도중이었사온데...”


“너무 늦은 시간입니다. 사나운 들짐승은 없다고 해도 밤의 숲은 위험하니 오늘은 그만 돌아가시는 게 어떨런지요.”




놀란 가슴이 진정이 되자 몸에 남아있는 소름끼치는 감각이 되살아났다. 알싸하게 아린 다리 사이를 어서 씻어내고 싶었다. 다시 그 지옥 같은 극단으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다. 사내는 몇 번이고 함께 내려갈 것을 권했지만 츠시키마는 번번이 고개를 저었다. 제 뜻을 꺾으려는 남자의 말의 뜻이 걱정인 것은 알지만 지친 마음은 그것에도 뿔이나 무시한 채 가려던 길을 가려 일어섰다. 호기롭게 일어선 것은 좋았지만 호되게 당한 몸이 아파 휘청거린 걸음에 사내가 앞을 막곤 등을 보이고 앉았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알지만 정말 그것에 따라도 되는지, 한 번도 누군가에게 업혀본 적이 없는 츠키시마가 망설였다.




“이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취한 걸음으로는 먼 길입니다. 데려다 드릴 테니. 자요.”


“무거우실텐데요...”


“그리 종잇장 같은 몸을 하고선 무슨 소리십니까.”




몇 잔 입에 대지 않은 술이었지만 무례한 작자가 난리를 치며 제게 뿌린 술이 옷자락에 배어 제법 냄새를 풍기는 모양이었다. 제가 휘청거린 것은 술기운의 탓이 아니었지만 츠키시마는 쿠로오가 지금 제 상태를 오해하는 것이 어쩐지 다행이라고 여겨졌다. 순수하게 저를 걱정하는 마음이 제가 무슨 연유로 이런 상태인지를 안다면 그 시선을 바꾸어 경멸하듯이 볼 것만 같아 조금 두려웠다. 그의 오해가 깨지기 전에 츠키시마는 조용히 그의 목을 둘러 안았다. 허벅지 아래를 단단하게 받친 팔이 비슷한 체격의 제가 버겁지도 않은지 가뿐히 걸음을 떼는 것에 츠키시마는 조금 놀랐다. 조금 살이 붙지 않았다 뿐이지 다른 사내와 비슷한 체구라고 생각했던 것이 무색하게 지금 업혀 있는 사내는 옮기는 걸음이 안정적이었다. 업힌 등이 제법 너르고 편안했다. 츠키시마는 불안을 잊고 풀냄새 가득한 어깨에 뺨을 대고 눈을 감았다.


유난히 달이 밝고 아름다워 잠이 오지 않아 헤매던 산중에 인기척이 들려 보니 그리도 그리워하던 이가 불편한 걸음새로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놀라 주저앉는 것을 부축하자니 훅 끼치는 술 냄새며 흐트러진 의복의 상태가 적잖이 술에 취한 것 같아 도무지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곱디고운 얼굴은 유순한 얼굴을 하고서는 제법 고집이 센 것 같았다. 길이 어두워 들짐승을 잡으려고 놓아둔 덫에라도 잘못 발을 디디면 어쩌나 혹시 비탈에서 넘어지진 않을까 온통 그런 걱정이 들었다.


도무지 꺾일 것 같지 않은 그의 뜻에 따라 그가 전에 목욕을 하던 그 곳까지 데려다 준 것까지는 좋았지만 이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쿠로오는 잠시 황망해졌다. 물가에 앉은 그가 감사인사를 전하고도 역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눈을 굴리는 것에 확 민망해졌다. 여인도 아니고 같은 몸을 지닌 사내인데 왜 이리 조심스럽고 새삼스러운 것인지, 동무들과는 함께 등목이나 더운 날 개천에서 함께 씻는 것이 드문 일도 아닌데 왜인지 이 사내의 벗은 몸을 본다고 생각하니 그러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저번에 얼핏 보았던 흰 속살이 스쳐지나가며 확 얼굴이 달아오른 쿠로오가 급히 몸을 돌려 조금 떨어진 곳에 등을 지고 앉았다.


생각해보니 그가 위험하지 않게 데려다 준다는 명분이기는 했지만 정말 무슨 용기로 감히 그런 것인지. 제게 업혀 등에 고개를 묻던 머리칼에서 은은하게 풍겨오던 분의 향긋한 내음과 간간히 닿던 숨결이 생각나자 몸이 더워졌다. 경사진 곳을 오를 때에 그 입술이 목덜미에 스쳤던 것도 같다. 뒤에서 들려오는 천이 사락거리며 풀어지는 소리는 영 좋지 못한 쪽으로 쿠로오의 상상을 이끄는 것이었다. 결국 쿠로오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 숲 안쪽으로 향했다. 뜨거워진 머리를 식힐 겸 꽃을 좋아한다던 그를 위한 꽃다발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운이 좋게도 아직 지지 않고 피어있던 상사화가 있었다. 상사화와 쑥부쟁이들을 한데 모으니 제법 그럴싸한 다발이 되었다. 다발이 풀어지지 않도록 질긴 풀이파리로 묶어 다시 돌아가자 마침 그도 물에서 나와 겉옷을 걸치고 있었다. 인기척에 조금 긴장한 듯 돌아본 그가 꽃다발을 보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옅게 남아 있던 분칠마저 지워져 드러난 맨 얼굴이 물에 젖어 투명하게 빛났다. 따뜻한 물에 데워진 뺨은 발그레한 고운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의 얼굴에 발라져 있던 인위적인 붉은 빛보다야 이편이 더 예뻤다. 꽃을 그 손에 쥐어주자 눈을 감고 향을 맡는 가지런한 속눈썹은 꽃의 꽃술인 듯 보였다. 아무리 꽃이 아름답다고 하지만 그걸 들고 있는 이 밖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눈이 들어 올려져 저를 바라보고 초승달처럼 휘었을 때 그 웃는 얼굴에 쿠로오는 호흡을 잊었다. 그토록 눈부시다고 생각했던 보름의 만월도 이 미소만큼 눈부시지는 못한 것 같았다.


부디 이 미소가 저물지 않기를. 계속 이토록 어여쁘기를. 이 아름다움을 온전히 그림으로 옮기고 죽을 수 있다면 여한이 없겠구나. 쿠로오는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아쉬울 만큼 벅찬 마음을 긴 숨으로 대신 뱉었다.


꽃을 한 아름 품에 안은 츠키시마가 쿠로오의 품에 다가가 기대어 안겼다. 구름이 지나며 달빛을 가려 어둠이 하나 된 두 사람을 가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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