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법 오래 만났던 여자와 헤어졌다. 이별을 고하는 그녀의 머리칼은 쿠로오가 좋아했던 레몬색 대신 차분한 고동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노란색, 잘 어울렸는데. 차이는 마당에 드는 생각이 한심해 쿠로오는 자조했다. 이미 떠나기로 마음 먹은 사람을 붙잡는 부질없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분명 어딘가가 좋아서 사귀었던 것일테지만 그런 헛수고를 할 정도는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쿠로오는 혼자 남은 카페에 앉아 그녀의 무엇이 좋았던 것인지 생각해 보았다. 잘 어울리던 금발, 애써 귀여움을 연출하지 않던 시니컬함. 음악 듣는 것을 좋아하는 취미나 고요한 성정 같은 것들. 아아, 쿠로오는 그런 것들을 나열하다 다시 한 번 자조했다. 이별을 고하던 그녀의 말이 이제야 이해가 갔다.
- 당신 옛사랑의 그림자에 가려져 사는 건 이제 그만 할래.
아무리 시간이 흘렀어도 벗어날 수 없던 쿠로오의 취향. 그 모든 건 오래 전 쿠로오가 만났던 한 소년을 가리키고 있었다. 쿠로오는 카페를 나서 담배를 샀다. 별로 바라는 것이 없었던 이전 그녀가 끊었으면 좋겠다는 말에 잠시 멀리 했던 쿠로오의 기호였다. 성인이 되고 나서 피운 담배였지만 고등학생 시절부터 알고 지낸 그 연인에게도 한 동안은 숨기고 지냈었던 것 같다. 그러다 담배를 피우는 것을 들키고 쓴소리를 들을까 잠시 긴장했던 것이 무색하게 돌아오는 것은 그러거나 말거나 하는 식의 무미건조한 반응이었다. 그리고 그의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희미해졌을 때 그가 소원초라는 것에 대해 말했다.
새 담배를 피우기 전 한 개비를 거꾸로 돌려 놓고 마지막에 그걸 피우며 소원을 빌면 소원이 이루어 진다며, 그것을 소원초라 한다고 했다. 자신은 담배를 피우지 않으니 언젠가 해보고 정말 소원이 이루어지는지 가르쳐 달라고 했다. 세상 다 산 늙은이 마냥 염세주의적으로 굴 때는 언제고 종종 이렇게 어린애 같은 미신을 믿는 것이 귀여워 웃었던 기억이 났다. 하지만 그와 연애를 하는 도중 소원초를 피운 적은 없었다. 새 담배를 뜯고 한 개비만 돌려 놓으면 되는 아주 간단한 일이지만 그게 왜 그리도 어려웠는지. 그는 한 번 말한 것을 재차 확인하며 재촉하는 스타일이 아니었고 지나치듯 흘러간 것을 기억할 만큼 쿠로오는 섬세하지 않았다.
이따금씩 그의 말이 생각나 한개비를 돌려놓는 것에 성공한다고 해도 담배를 피우는 도중 소원초로 돌린 담배를 먼저 피워버리는 둥 아무튼 이러저러한 연유로 소원초가 정말로 효과가 있는지는 그에게 말해줄 수 없었다. 그러는 동안 그와의 연애도 끝이 났다. 그랬던 주제에 시간이 이렇게나 흐른 지금에서야 그 말을 기억해 소원초를 피워보려는 것도 우습지만 쿠로오는 소원초를 보며 지나간 옛사랑의 추억에 잠겼다. 부활동을 하지 않았다면 절대 만날 일도 없었고 접점도 생기지 않았을 그런 사람. 츠키시마 케이에게 쿠로오는 깊이도 빠졌었다. 한 눈에 반했고 정신 없이 그에게 몰두했다.
1년을 알고 지냈고 제가 졸업을 하며 연애를 시작해서 2년. 도쿄와 미야기의 거리 상 자주 만나지는 못했다. 연애를 한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만나 데이트를 한 것도 열 손가락을 겨우 넘길 만큼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좋았다. 쿠로오는 소원초를 바라보며 한 개비씩 담배를 피울 때마다 츠키시마를 생각했다. 특별하다고 믿었던 그와의 연애는 평범하게 끝이 났었다. 보통의 연인들이 헤어지는 무수한 이유 중 몇 가지의 공통사항으로.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었다. 쿠로오는 츠키시마만큼 사랑했던 사람이 없었다. 그만큼 사랑을 할 자신도 없었다.
처음으로 사귀던 날, 처음 데이트라는 이름의 만남을 가진 날, 몸을 겹친 날, 크게 화를 내며 싸웠던 날, 그런 것들을 곱씹다 보니 어느새 담뱃갑 안엔 소원초 한 개비 만이 남아 있었다. 드디어 이걸 피워보는 건가 웃으며 쿠로오는 저물어가는 노을을 바라보며 담배에 불을 당겼다. 무슨 소원을 빌지 계산이 서기도 전에 드는 생각이 있었다.
보고 싶다. 케이.
해가 지는 하늘의 끄트머리 쪽 색깔이 그가 있었던 학교의 유니폼 색깔 같다는 영양가 없는 생각으로 의식이 흘러가고 어느덧 소원초도 그가 뱉는 호흡에 맞춰 짧아져 갔다. 검지를 튕겨 불씨를 꺼트리고 착실하게 쓰레기통에 넣은 쿠로오가 괜히 주변을 둘러봤다. 퇴근이며 하교를 하는 사람들로 붐비는 거리는 한 눈에 보아도 그가 줄곧 생각한 주인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오랜만의 감상에 콧날이 괜히 시큰해져 바보같다는 생각에 쿠로오는 살래살래 고개를 흔들며 웃었다. 집으로 가자. 쿠로오는 전철역으로 향했다. 계단을 내려가 주머니 속 엉킨 이어폰을 풀고 귀에 꽂으려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건너편 플랫폼에 서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노을에 붉게 물든 레몬색의 결좋은 곱슬 머리. 시니컬한 인상을 주는 뿔테 안경. 여전히 조금 마른 커다란 키. 쿠로오의 눈이 크게 뜨였다. 거짓말, 이지. 순간 주변의 소음이 멀어지며 쿵쾅거리는 심장 고동 소리만이 크게 들려왔다. 그의 주변 사람들이 희뿌옇게 보이며 놀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그만이 또렷하게 보였다. 그리고 건너편에 마침 도착한 기차가 그를 가렸다. 쿠로오는 내려왔던 계단을 세칸씩 뛰어 올라 반대편 플랫폼으로 달렸다. 그가 이미 지나간 전철을 탔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그렇다면 이렇게 턱에 숨이 차도록 달리는 것은 헛수고가 되는 것이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구르듯이 계단을 내려가 한차례 사람들이 지나간 플랫폼은 조용했다. 붙잡고 싶어 온 주제에, 그가 전철을 탔다고 해도 상관 없다는 생각으로 달렸던 주제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볼 자신이 없어진 쿠로오는 고개를 숙인 채 무릎을 짚고 숨을 골랐다.
"와아. 빨라. 여기 계단 엄청 많은데."
그리고 머리 꼭지 위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쿠로오의 상체가 번쩍 들렸다. 아직 숨이 모자라 어지러운 시야 사이 분명하게 서있는 건 쿠로오가 그토록 혼자서 곱씹던, 그리워 마지 않던 옛사랑이었다. 옛날보다 길어진 머리카락이 이마를 덮고 조금 더 세월의 흔적이 묻은 얼굴이지만 여전한 말투며 표정에 쿠로오가 웃었다. 진짜로, 효과 있네. 소원초. 이마에 송글송글 맺히기 시작하는 땀방울을 닦으며 쿠로오가 말했다.
"저녁 아직이면, 밥 같이 먹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