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키시마는 목도리에 고개를 파묻었다. 내쉬는 숨결에 안경에 김이 서려 조금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겨울 싫어. 매서운 겨울 바람에 코 끝이 시렸다. 코를 훌쩍거리며 주머니 속 손가락을 꼼질 거릴 때 손 안에서 휴대폰의 진동이 울렸다. 장갑을 낀 탓에 스크린을 터치하는 게 더뎌 츠키시마는 장갑을 벗었다. 그러는 도중에도 계속 울리는 진동이 멎을까 초조했다. 장갑과 휴대폰을 같이 쥐고 전화를 받으며 두리번거리자 기다리던 이의 목소리가 늘 그렇듯 퍽 살갑고 다정했다. 


[어디 있어?]

"역 앞에 있는 빵집 앞요."


대답하며 주변을 둘러보자 곧 시야에 삐쭉 튀어나와 있는 검은 머리카락이 보였다. 인파에 가려져 얼굴이 보이지 않아 츠키시마가 상체를 옆으로 기울이자 함께 몸을 기울인 쿠로오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자 활짝 웃으며 쿠로오가 손을 붕붕 흔들었다. 굳이 반응하지 않고 잠자코 전화를 끊자 어느새 쿠로오가 앞에 다가섰다. 


"늦었잖아요." 

"미안미안. 오래 기다렸어?" 


볼멘 소리로 투덜대자 추위에 발개진 코 끝에 쿠로오가 손등을 가져다 대었다. 콧날에 와닿는 쿠로오의 손등이 따뜻했다. 츠키시마는 눈을 감고 그 손등에 코를 부볐다. 머리를 쓰다듬어준 쿠로오가 츠키시마의 팔짱을 꼈다. 


"따뜻한 거 마시러 가자." 


아직 주머니에 넣고 있는 츠키시마의 손 위로 쿠로오의 손이 들어왔다 나갔다. 한 번 손을 깍지껴 잡은 쿠로오가 쥐여준 손난로가 따뜻했다. 쿠로오가 이끈 카페는 아늑하고 포근했다. 세월의 흔적이 곳곳에 묻어있었지만 오히려 그것이 더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것이었다. 어디서 구했는지도 모를 오래된 엘피판 특유의 음색이 흐르는 카페는 츠키시마의 마음에 쏙 드는 것이었다. 줄곧 이 동네에 살면서도 처음 와보는 곳이었다. 이런데는 어떻게 알고 찾아오는 건지. 도쿄 사람이 저보다 더 미야기를 잘 아는 것 같았다. 음료가 나오기 전 서비스로 나오는 구운 식빵 조각에 생크림과 딸기잼을 바르는 츠키시마의 발 끝을 톡톡 쿠로오가 건드리며 발장난을 쳤다. 가만히 두자니 점점 제 발 위로 꼼질거리는 것이 성가셔 츠키시마 역시 발 끝으로 쿠로오의 발을 툭 쳤다. 하지말라는 뜻이었지만 쿠로오는 아예 작정한 듯 양 발로 츠키시마의 신발을 벗기려는 듯 츠키시마의 신발을 잡아 당겼다.


아 진짜 초등학생도 아니고. 짜증을 내면서도 테이블 아래에서 발장난은 한참 이어졌다. 하지 마요. 결국 투정 부리는 츠키시마가 귀엽다는 듯 이 유치한 장난이 재밌다는 듯 쿠로오가 소리내 웃었다. 연이 계속 이어질 거라곤 생각지도 못한 사람. 쿠로오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배구를 그만두면서 더 연락이 이어질 거라는 생각도 못했다. 그도 그럴게 합숙 기간에 보는 것 외에는 따로 연락한 적도 형식적으로 번호를 교환했을 때 말곤 없었다. 그래서 처음 쿠로오에게 미야기에 갈 것이라는 연락을 받았을 땐 참 놀랍기도 했다. 쿠로오는 함께 배구를 할 때보다 더 많이 연락을 해왔다. 한 두번 하고 말겠지. 하던 연락은 꾸준히 이어졌다. 가볍게 커피 한 잔, 밥 한끼 하던 것은 틈만 나면 시덥잖은 것이라도 연락을 하게 되는 사이가 되도록 했다.


밤잠을 줄여가며 늦은 새벽까지 전화를 하기도 했고 가끔은 츠키시마가 도쿄로 올라가기도 했다. 최신 영화를 함께 보고 맛있는 곳이 있다면 함께 먹으러 가기도 했다. 시험 공부로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하자 쿠로오는 미야기 근처의 수족관으로 츠키시마를 불러내기도 했다. 종종 츠키시마를 꼭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는다거나 깍지를 껴 손을 잡던가. 그런 스킨십은 남자끼리 새삼스러운 것이었지만 딱히 싫지 않았다. 조금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다정함을 느끼면 어쩔 줄 몰라했으나 츠키시마는 동요가 얼굴에 드러나는 타입은 아니었다. 


쿠로오가 완전히 츠키시마의 일상에 녹아들었을 즈음. 드디어 츠키시마가 성인이 되었을 때. 츠키시마의 손을 잡고 걷던 쿠로오가 물었다. 


"나를 어떻게 생각해?" 


새삼스럽게 무슨. 츠키시마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왠지 모르게 긴장됐다. 제 손을 잡고 있는 쿠로오 또한 긴장한 것이 마주한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것 같았다. 답지 않게 굳은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쿠로오의 눈빛이 그저 단순하게 흘러가는 질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올곧게 저를 바라보는 눈은 언제나와 같았지만 평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에 츠키시마는 아무렇게나 대충 대답하려던 것을 말고 말을 잃었다. 쿠로오는 재차 물었다. 


"나를, 어떻게 생각해?" 


츠키시마는 입 안이 바싹 말라 혀로 입술을 적셨다. 얼른 대답을 해줘야 하는데 머릿속이 백지가 된 듯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하지. 쿠로오의 시선을 견디지 못한 츠키시마가 고개를 숙이고 눈동자만 이리 저리 굴렸다. 츠키시마의 손을 잡고 있던 쿠로오의 손이 떨어졌다. 신체의 아주 작은 일부분 하나만이 닿아있다 떨어졌을 뿐이건만 그 사소한 온기 하나가 떨어졌다고 온 몸이 추워지는 기분이었다. 츠키시마는 살짝 몸을 떨고 더듬 더듬 대답했다. 


"...좋은 선배죠." 


쿠로오는 후.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또?" 


여기에서 뭘 더 대답하라는 거지. 츠키시마는 조금 도망가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어서 이 불편한 상황이 끝났으면 좋겠다. 츠키시마는 더 대답하지 않았고 쿠로오는 츠키시마의 머리꼭지를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그 웃음 소리에 다시 쿠로오를 마주한 츠키시마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쿠로오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옴에 츠키시마는 그만 아득해져 눈을 꼭 감았다. 키스, 당하려나.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무색하게 입술은 겹쳐지지 않았다. 쿠로오는 츠키시마를 품에 꼭 끌어안고 그 어깨에 이마를 파묻을 뿐이었다. 두근 두근. 겨울이라 두꺼운 옷 너머로도 빠르게 뛰는 심장 고동 소리가 느껴졌다.


"응. 그렇구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츠키시마 역시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한참 저를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는 쿠로오의 등을 마주 안아주려 츠키시마가 팔을 드는 순간 쿠로오가 물러났다.


"조심히 가." 


쿠로오는 츠키시마에게 한 번 웃어보인 뒤 뒤돌아 걸어갔다. 처음이었다. 쿠로오가 츠키시마보다 먼저 돌아선 것은. 도쿄에 올라왔는데 기차도 함께 기다려 주지 않은 것은. 츠키시마는 한 번 돌아보지도 않는 낯선 쿠로오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어딘지 불안해 먼저 메시지를 보내어 봤지만 역시 답장이 오는 텀이 길었다. 그리고, 쿠로오에게서 먼저 연락이 오는 일은 없어졌다. 


한 번 받아들이기는 어려워도 제 사람이라는 영역 안에 들인다면 한 없이 물러지는 츠키시마는 이미 생활 곳곳에 물들어 있는 쿠로오의 생각을 많이 했다. 주말이 심심해졌고, 짬이 나는 시간마다 오던 메시지가 없으니 허전했다. 그리고 자꾸만 마지막 날 저를 안아 주고 돌아섰던 모습이 아른거렸다. 나쁜놈. 뭐가 나쁜 건지 제대로 알지는 못하면서도 츠키시마는 분했다. 신경 쓰지 말아야지. 잊고 지내야지. 그러면서도 츠키시마는 오래도록 쿠로오의 생각에 잠겨 지냈다. 


그러다 겨우 쿠로오의 잔상에서 벗어났을 즈음. 휴대폰의 액정에 익숙한 이름이 떠올랐다. 번호 안 바꿨구나. 츠키시마는 걷다 말고 멈춰서 한참 액정을 내려다 보았다. 무시할까하다 천천히  손가락을 옆으로 밀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먼저 전화를 건 주제에 받을 줄 몰랐다는 듯 츳키? 하고 부르는 놀란 목소리가 우스웠다. 형식적이고 진부한 안부인사에 대충 단답으로 대답하는 츠키시마의 반응에 이어진 통화시간은 짧았다. 묻고 싶었던 것이 많았다. 하지만 묻지 않았다. 궁금하면서도 궁금하지 않았다. 


냉대하는 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 쿠로오는 다시금 조금씩 츠키시마에게 연락을 취해왔다. 한 번 보자는 것을 미루고 미루다 더 거절할 수 없어 식사 약속을 잡았다. 보기 껄끄러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대화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마지막으로 본 게 몇 년 전이니 제법 오랜 기간을 보지 않은 것임에도 바로 저번 주에 만났던 사람 같은 것이 신기했다. 그렇게 어영부영 다시 쿠로오와의 연락이 이어졌다. 세월이 흘러 도쿄에서 지내고 있는 츠키시마였기에 만남의 내용은 저번보다도 사소하고 잦아지게 되었다. 


함께 마트를 들렀다 돌아가는 길. 아무 것도 사지 않은 츠키시마의 손을 슬쩍 쿠로오가 잡으려 했다. 츠키시마는 물고 있는 아이스크림을 잡고 있던 손을 바꾸는 척하며 그 손길을 피했다. 몰래 옆을 쳐다보자 쿠로오의 손이 멋쩍게 다시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츠키시마는 외면했다.


"츠키시마." 


말 없이 걸은지 얼마나 되었을까. 츠키시마의 집 근처 골목에서 쿠로오가 츠키시마를 불러세웠다. 츳키- 라거나 장난스럽게 안경군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닌 목소리에 시간을 돌려 그 마지막날로 돌아간 것 같은 긴장이 츠키시마를 감쌌다. 지금은 겨울이 아니라 한 여름이었지만 꼭 그 때처럼 몸이 떨리는 듯 했다. 왜요. 눈을 피한 츠키시마가 묻자 다시 걸음을 옮기며 쿠로오가 말을 이었다. 


"미안했어." 

"뭐가요." 

"갑자기 연락 끊었잖아." 


이제와서 사과하는건 좀 뻔뻔한 거 아닌가. 뒤따라 걷던 츠키시마는 그 때 제가 했던 속앓이가 생각나 울컥했다. 쿠로오는 츠키시마의 작아진 목소리에 돌아서 다시 그의 손을 잡고자 했고 츠키시마는 뿌리쳤다. 


"왜 이래요." 


정말 싫다는 듯 뒤로 물러나 거리를 벌리는 츠키시마를 쿠로오는 곧게 쳐다보았다. 하지만 이번엔 긴장이라거나 불안 같은 것은 그 시선에 담겨있지 않았다. 그저 체념만이 들어 앉아 있는 시선이었다. 


"좋아했어. 너를. 후배가 아니라 그냥 케이 네가 좋았어." 


쿠로오는 고개를 숙이고 긴 숨을 내쉰 뒤 웃었다. 


"미안해. 조심히 가." 


그리고 먼저 뒤돌아 서는 뒷모습. 그걸 바라보던 츠키시마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보폭을 넓혀 성큼성큼 그 뒤를 따라가 그 허벅지를 무릎으로 콱 찍었다. 억. 순간 중심을 잃고 휘청거린 쿠로오가 토끼눈을 하고 츠키시마를 돌아보았다. 


"츳키?"

"뭐가 이렇게 맨날 자기 멋대로인 건데요. 맘대로 치고 들어왔다가 맘대로 빠지고. 돌아서고. 내 대답은 제대로 듣지도 않고. 무슨 상황인지 뭘 바라는지는 설명도 안 해주고. 지금 뭐하자는 거예요. 이러고 또 연락 끊으려고. 좋아했어요? 그럼 왜 그 때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요? 왜 계속 혼자 상황을 정리하려고 들어요?" 


찍힌 허벅지를 아픈 표정으로 문지르던 쿠로오가 츠키시마의 항변에 자세를 바로 했다. 


"울지마. 내가 잘못했어." 


츠키시마의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손가락으로 거두어 간 쿠로오가 변명했다.


"그 땐 너무 어려서 무서웠어. 남자가 남자를 좋아할 수 있다는 걸 받아들이는 것도 힘들었고 네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고... 그렇지만 역시 너를 잊을 수는 없었고. 지금은 너무 늦은 것 같아서..." 


말 같지도 않은 변명에 츠키시마는 분이 풀리지 않아 씩씩 댔다. 당신은 비겁해. 비난하자 맞아. 미안해. 곧바로 수긍하고 사과하는 게 더 열 받았다. 


"그래서 어쩔 건데요." 


어느새 눈물이 쏙 들어간 츠키시마가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서 쿠로오에게 따져 물었다. 쿠로오는 츠키시마에게 어찌할 줄 모르고 혼나는 어린애처럼 안절부절 못했다. 


"어쩔 거냐니... 츳키는 날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누가 언제 안 좋아한다고 했는데요?" 


쿠로오의 말을 자르고 대답한 츠키시마가 동그랗게 떠지는 쿠로오의 표정에 아차 싶어 그대로 등을 돌렸다.


"됐어요. 생각보다 근성이 없으시네요. 역시 그만두죠." 


빠른 걸음으로 도망치듯 자리를 뜨려는 츠키시마의 뒤로 다급하게 비닐봉지가 바스락 거리며 흔들리는 소리와 발소리가 따라 들려왔다. 와락 뒤에서 끌어 안겨져 명치를 팔꿈치로 찍어버릴까 하던 츠키시마가 참았다. 


"더워요! 떨어져요!" 


쿠로오의 팔을 떼어내려는데 어깻죽지 쿠로오가 이마를 짚은 부분부터 축축하게 젖어 들어가는 것이 느껴져 츠키시마가 멈칫했다. 그리고 작게 이어지는 코 훌쩍이는 소리. 츳키 좋아해...... 잔뜩 메인 소리로 들리는 고백에 츠키시마가 제 허리를 끌어안은 팔을 토닥토닥 다독였다. 


"좋아했다면서요. 이제 안 좋아하는 거 아닌가." 


일부러 비아냥대자 어깨에 기댄 머리가 세차게 가로저어졌다. 


"아니야 좋아해 지금도... 계속 좋아했어....." 


츠키시마가 다시 쿠로오의 팔을 떼어내자 이번엔 순순히 떨어진 쿠로오가 우는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려는 듯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숙였다. 


"전 쿠로오씨 별론데." 


눈물을 닦고 고개를 들려고 하던 쿠로오가 츠키시마의 대답에 다시 눈가를 가리고 고개가 푹 수그러 들었다. 


"처음부터 다시 제대로 꼬셔봐요. 그럼 넘어가 줄 수도 있고." 


덧붙인 츠키시마의 말에 그렁그렁한 눈으로 다시 자신을 와락 끌어 안은 쿠로오를 마주 안아주며 츠키시마가 생각했다. 그날 이렇게 당신을 마주 안아주지 못한 것이 그렇게도 마음에 걸렸었다.


"내가 진짜 잘해줄게." 


흐엉흐엉 우는 소리를 내는 게 세상 다 산듯 전부 잘하는 것처럼 보이더니 사실 울보에 겁쟁이었잖아. 싶었지만 나름 이런 모습도 귀엽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덥지만 품 안 가득 들어찬 온기에 잔설처럼 남아 있던 츠키시마의 마음 속 앙금들이 사르르 녹아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봄볕 같은 사람. 당신을 내가 어떻게 미워할 수 있겠어. 츠키시마는 쿠로오를 안은 팔에 꼬옥 힘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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