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판타지물 보고 싶다. 젊어보이는데 돈 많고 다개국어 능통하고 머리 스타일 빼면 외모도 훤칠하니 여러모로 능력 좋아서 사람들이 장난으로 낫닝겐! 하는데 진짜로 드래곤인 쿠로오.
인간을 사랑하는 건 한낱 부질없다고 생각했지만 첫눈에 츳키한테 반해서 드래곤인 거 숨기고 사귀게 됐는데 인간이랑은 공적인 관계만 맺은지 너무 오래 돼서 츳키랑 말하다보면 자꾸 헛소리하는게 보고 싶어. 인간의 시간으로 몇 백년을 살았지만 드래곤은 몇 백년 정도야 그냥 찰나 같으니까. 드래곤 중에서는 어린 편인 쿠로오는 그 스쳐지나온 세월이 얼마나 인간에게 긴 시간인지는 아직 잘 와닿지는 않은 상태여서. 갑작스러운 소나기에 급히 편의점에서 우산을 사서 나눠쓰고 가는데 쿠로오가 우산 빙글빙글 돌리면서 요즘은 비닐우산도 참 튼튼하단 말이지. 처음 비닐우산이 나왔을 때만해도 정말 얇은 비닐 조각 이었는데.... 해서 츳키가 장난으로 어느 시대에 태어나셨어요? 물어보는데 혼자 제발 저리고 뜨끔해서 식은땀 줄줄 흘리는 쿠로오. 말하다 보면 불쑥 불쑥 메이지 시대 쇼와시대 얘기를 직접 겪은 듯 생생하게 하는 건 그냥 화법이 이상한가보다 넘기는 츠키시마.
그렇게 여차저차 정체 잘 숨기고 사귀다가 쿠로오가 일이 많아서 일주일동안 못자고 일만하다가 드래곤 모습으로 자고 있는데 얼마전에 쿠로오네 집 스페어키 받은 츳키가 문 열고 들어옴. 침대에서 엎어져 자다가 현관 열리는 소리에 번쩍 정신이 들어서 뭐지 뭐지 하다가 아 맞다 취해서 츳키한테 스페어키 줬지 하고 베개에 고개 처박고 삐질삐질하는데 쿠로오씨 안계신가... 하고 방문 열었다가 침대 위에 있는 쿠로오 본체 보고 놀라서 굳는 츳키. 쿠로오는 츳키 기척이 확 달라지니까 아 씨 망했다 부터 시작해서 미쳤지 어떡하지 소리 없는 아우성 지르겠지. 근데 츳키가 전에 이런 인형이 있었나. 중얼거려서 그래 인형인척하자!!
가만히 있는데 타박타박 다가온 츳키가 쿠로오 꼬리 손가락으로 콕콕 눌러보다가 우와... 하고 폭 안는 거. 쿠로오는 츳키가 자기 꼭 안아주니까 이게 무슨 일인가 싶고 식은땀 날 것 같고 숨도 제대로 못 쉬겠고 죽겠는데 공룡덕후 츳키는 엄청 리얼하다고 여기저기 만지고 누르고 난리났음. 그러다가 날개 펴보려다가 쿠로오 등을 체중 실어서 누르는데 아무리 마른 애라고는 해도 190넘는 남자애니까 아무래도 기본 무게가 있을 거고 크억 하고 눌린 소리가 나와버려서 쿠로오도 놀라고 츳키도 굳고 가만히 수십초 가량의 정적이 흐르고 츳키가 다시 한 번 쿠로오 등을 콱 눌러보고 긴장은 하고 있었지만 다시 이렇게 눌릴 줄 몰랐던 쿠로오는 아까보다 커헉 하고 큰 소리 내버리겠지. 그제야 주춤 침대에서 내려와서 쿠로오가 파묻고 있는 베개 슬그머니 당겨보다 쿠로오랑 눈마주치고 사색이 돼서 뒤로 물러나는 츳키. 아무리 드래곤인채로 순하게 눈 깜빡여봤자 츳키는 멘붕일 뿐이고 멘붕인 눈에는 이렇게 내가 괴물한테 먹혀 죽나 지금껏 봤던 SF영화의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겠지ㅋㅋㅋ
내가 아무리 공룡을 좋아하지만 사인이 공룡에게 잡아 먹히는 건... 하면서 아 형아 엄마 아빠... 쿠로오씨 죄송해요... 생각하면서 도망칠 순 없을까 데록데록 머릴 굴리다가 이대론 안되겠다고 생각한 쿠로오가 슬그머니 몸을 일으키니까 츳키가 히에에엑 소스라치며 일어나서 막 잡히는 대로 로션병 같은 거 던져가지고 드래곤의 위엄이고 뭐고 머리 감싸쥐고 다시 엎어져서 악악 소리 내는 쿠로오의 하찮음이 좋다... 츳키가 던지다 던지다 옆으로 옮겨서 쿠로오랑 자기랑 찍힌 사진이 들어있는 액자를 잡아서 던지려는데 쿠로오가 나야!! 나라고!!! 쿠로오야!!! 케이 잠깐만!! 하고 소리질러서 츠키시마는 멈칫함. 말도해... 아니 누구라고... 쿠로오씨라고... 거짓말.... 황망하게 거의 울 것 같은 츠키시마한테 쿠로오가 다가가려다가 또 츠키시마가 액자 던지려고 팔 들어서 머리 감싸 쥐고 쿠로오 다시 엎어지고. 침대에 머리 감싸 쥐고 웅크리고 있는 씨꺼먼 드래곤이 한참을 가만히 그러고 있다가 고개만 돌려서 슬그머니 눈 마주치는데 색색 숨 몰아쉬던 츳키도 그제야 제대로 그 드래곤의 눈을 바라보겠지 아까는 무섭기만했던 노랗고 동공이 세로로 길쭉한 눈동자가 조금 울상인 게 위험할 것 같진 않아서 츠키시마도 들고 있던 액자를 내려놓음. 안 잡아 먹을 거죠? 하고 묻자 쿠로오도 끄덕끄덕끄덕 고개를 빠르게 끄덕이다가 아! 하고 폴리모프해서 사람으로 변신함. 백날 드래곤인 모습으로 내가 쿠로오라고 해봤자 믿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일단 애가 너무 겁을 먹은 것 같으니까 그걸 풀어주려고 사람으로 돌아온 건데 변신하니 알몸에다 눈 앞에서 드래곤이 인간이 되는 과정을 본 츳키는 더 멘붕이 오고...
인간이 된 채로 자기를 가리키며 쿠로오... 나... 를 주절거리는 걸 이제 생각하기도 포기한 멍한 머리로 가만히 응시하다가 방문 밖으로 나가버리는 츠키시마. 그리고 급히 얇고 흰 이불로 몸 둘둘 말고 쫓아가는 쿠로오. 이대로 밖에 나가서 신고하면 기억을 지우는 약을 먹여야하나, 어떻게 설득해야하나. 안녕 내 사랑 이렇게 널 떠나보내야하는 거니 울며 겨자먹기로 급하게 따라나갔는데 츳키는 밖으로 뛰쳐나가기보다는 손바닥으로 눈 꾹꾹 누르면서 소파에 앉을 뿐이어서 야단맞을 어린애처럼 조심스럽게 그 앞으로 가서 쿠로오도 앉아 츳키가 뭐라도 말해주길 기다림. 얼마간을 그렇게 대치 상태로 침묵을 지키고 있었을까 츳키가 먼저 그래서, 아까 그 용이 정말로 쿠로오씨라고요. 끝을 올리지도 않고 싸늘한 말에 뛰쳐나가지 않았으니 그래도 일단 희망은 있나?
했던 쿠로오 다시 안절부절못하고 역시 기억을 지워야하나 싶어 울고 싶겠지. 역시 인간을 사랑하는 게 아니었을까, 수도 없이 고민했던 명제에 다시금 괴롭고. 대답을 바라고 물어본 질문은 아닌 것 같지만 일단 물었으니 대답으로 응. 하니 돌아오는 건 땅이 꺼져라 묵직하게 내쉬는 한숨. 눈 위를 누르던 손을 내려 허벅지를 짚고도 그 눈이 떠지지 않음에 쿠로오도 츠키시마를 보던 시선이 발 끝으로 내려가서 올라올 줄 모름. 지금까지 잘도 속였네요. 하는 말에 쿠로오가 벌떡 고개들고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니었어! 항변해보지만 그럴 의도가 있었든 아니었든 결과적으로 속인 건 맞잖아요 하는 말에 다시 고개를 숙이고 미안... 사과함.
말하기도 어려웠고 이미 츳키를 너무 좋아하고 역시 미안하고 구구절절 변명하다가 네가 아무한테도 말 못할 비밀 때문에 너무 힘들것 같다면 내 기억을 지워줄 수도 있다고. 이런 괴물인 걸 알았으니 더 좋아해달라고 할 염치는 없다며 말하는 힘없는 웃는 얼굴에 아랫입술을 말아무는 츳키.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을 괴물이라고 지칭하는 것도 어딘지 짠하고, 자기가 신고당할까봐 신변 걱정 때문이 아니라 제가 힘들 것을 걱정해 기억을 지워주겠다는 마음이 사무치도록 예쁜 자기가 좋아하는 쿠로오가 맞아서. 그리고 진지한 말 하는데 이불 한 장 몸에 말고 말하는 뽄새가 좀 모양 빠지는 모습이기도 했지. 말을 다 마치니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서는 푹 고개 숙이고 훌쩍거리는 쿠로오한테 가서 꿀밤 딱콩 때리고 뭘 잘했다고 우는 거냐고 혼내는 츳키가 잔소리 폭탄 퍼붓고 이미 반해버린 걸 없었던 일로 하고 싶지 않아 계속 사랑하기로 해줬으면. 그러면서 일어나는 가벼운 헤프닝들!!
용의 모습인 채로 있는 게 편하니까 츳키랑 둘이 집에서 있을 때는 용 모습으로 있는데 공룡덕후가 그 모습을 더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아서 이상하게 둘 다 자기 자신은 맞고 용인 모습이 본체인데 폴리모프한 자기가 그렇게 이상한가 고민하는 쿠로오라던가.
용인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저 비늘... 눈, 날개.....! 멋져!! 잘생겼다!! 하트 뿅뿅한 눈으로 사랑스럽게 바라봐주는 츳키의 눈빛에 기분이 묘한 쿠로오. 그리고 사실 공룡 좋아하는 거 알고 츳키가 자꾸 공룡들이랑 놓고 생각하니까 아 난 걔네랑 다르다고!!! 걔네는 약해빠졌어!!! 그래서 멸종했잖아!!! 해서 비늘 두어개 뽑힐 뻔 하고. 사람일 때야 달린데에 달려있고 둘이 한 몸이 되어봤으니 안다지만 용인 모습일 때 그건 어디에 있는 걸까 궁금해진 츳키가 한동안 물어보지도 못하고 계속 용일 때의 쿠로오 꼬리를 자꾸 들었다 내렸다 하는 것도 보고 싶다ㅋㅋㅋ 궁금해죽겠다는 눈으로 뭔가 자기한테 볼 일이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말은 안 해주고 영문 모를 짓만 하고 있어서 자꾸 누워봐라 옆으로 굴러봐라 하는 요구에 어리둥절한 것도 보고싶다.